내게는 무슨 일이 있어도 노동절에는 노동자 기념 행사에 참석해야 한다는 나름의 다짐이 있다. 나 같은 사무직 중간 계급이 이런 행사조차 참석하지 않으면 자본가의 하수인 노릇과 갑질 진상짓을 하면서 부지불식간에 영혼이 썩어 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일상 생활을 영위하는 회사 내부에서는 상대적으로 안정된 정규직의 삶이 허용하는 정의가 피상적인 선함에서 벗어나기 힘든 데 반해, 노동절 행사에서 확인할 수 있는 정의는 구체적이고 절박하며 다양하다. 아무튼 2014년 5월 1일 노동절 일과를 간단하게 정리해 본다.

희망연대노동조합 SK브로드밴드 비정규직지회 @노동절

인터넷, 케이블TV 기업 서비스센터 비정규직이 모여서 구호를 외치는 중. @노동절

시청 광장에는 세월호 참사를 기리는 분향소가 마련되어 있어, 이번 노동절 행사는 서울역 광장에서 치러졌다. 이 행사에서 마음이 가는 장면이 있어 사진을 담아 뒀다. 광장 한 켠에서 SK브로드밴드, LG U+, 티브로드, 씨앤앰 등 인터넷, 케이블방송의 서비스센터 비정규직 직원들이 스스로를 조직하고 조합을 결성하여 제 권리를 주장하는 구호를 외치는 중이었다. 어쩌다 보니 지금까지 직장으로 몸 담고 있는 곳이 동종 업계이고 이들을 쉼 없이 괴롭히는 원청 업체 정규직이다 보니 이들 서비스센터 직원들의 부당한 삶의 고난에 대해 죄책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 광경에 집중하게 된 것 같다. 평소에는 원청 업체들의 피 터지는 경쟁 관계 아래서 서로 으르렁거리며 다투기도 했겠지만, 지금 이들은 한 데 모여 같은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이들이 바라는 것은 상시화된 고용 불안을 해소하고 원청이 직접 고용해야 하며, 과도한 평가 시스템으로 터무니 없니 비현실적인  임금 체계를 개선하고 설치 AS 기사에게 영업 행위를 강요하지 말아 달라는 것이었다.  이들의 요구는 틀린 것이 하나도 없는데 어느 것 하나 해결되지 않은 채 십 여 년이 흘렀다.

노동절 기념 행사를 마치고 참석자들은 모두 시청 광장으로 행진을 했다. 행진 초반에는 선두에 선 장애인 연대를 경찰이 과잉 통제하다 마찰이 벌어졌고 부상자도 생긴 것 같았다. 언제나 그렇듯이 한국 경찰은 시민을 잠재적인 범법자로 본다. 주장하기 위해 거리로 나선 시민을 도로의 자동차보다 못한 존재로 본다. 이는 국가가 시민을 굴종하고 순응하는 신민으로 본다는 걸 의미한다. 한국에서 시민은 국가를 넘어 본 적이 한 번도 없다는 생각을 잠시 곱씹었다.

국화

아무튼 상황이 종료되고 행진이 시작됐는데, 이번 행진은 어느 때보다 경건한 느낌이었다. 세월호 참사 희생자를 추모하고 이 상황을 초래한 국가와 신자유주의를 성토하는 방송이 흘러 나왔다. 방송을 듣자니 슬프고 답답해진 심정 만큼 걸음도 느려진 느낌이었다. 최근 내 주변과 사회 전반에 믿을 수 없는 비극이 연달아 벌어지고 있어, 사실 요즘 내 심정은 참담함과 우울의 늪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다.

천천히 움직여 시청 광장에 도착하자 예전과 달리 참석자들은 방송을 끄고 깃발을 내린 후 각자가 알아서 세월호 분향소로 향했다. 이것으로 노동절 기념 행사는 끝난 셈이었다. 분향소를 찾은 시민들의 행렬은 무척 길어서 분향소 뒤로 줄이 세 바퀴나 돌아 나고 있었다. 국화 한 송이를 헌화하고 묵념하고 나자 오늘 이렇게 혼자 나온 내가 외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락커스

락커스

노동절의 한낮을 이렇게 보내고 나서 오랜만에 흥곤이를 만났다. 특별한 화제 없이 밥을 먹고 바닐라 라떼를 마신 후 락커스를 들러 맥주 한 병을 마셨다. 몸도 마음도 피로한 상태여서 흥은 안 났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만난 친구는 반가웠다. 그리고 언제나 종로 언저리 그 곳에 그대로 있는 락커스가 고맙고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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