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작>

영화 정보 사이트에서 <마작>의 장르를 코미디로 분류하고 있지만 이런 방식의 범주화가 얼마나 짓궂은 혼란을 야기하는지는 두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런 방식의 범주적 사전 지식이 때로는 영화적 경험에 신선한 충격을 주기도 한다. 이 영화에서 표면적으로 코미디에 가까워 보이는 것은 홍어를 추적하는 갱 듀오 뿐이다. 그 허술함과 장난스러움은 영화의 시작부터 홍어 무리를 따라다니는 위험의 기운을 진지하게 경계할 필요 없는 해프닝인 것처럼 바라보게 만든다. 갱 듀오는 큰 빚을 진 홍어의 아버지를 추적하다가 좌충우돌 끝에 홍어에게 총을 쥐어 준다. 겉멋이 든 자와 장난기 넘치는 허술한 자, 코미디 갱 듀오가 총을 들고 있는 동안은 그것이 장르적 관습 안에서 기능하는 기호에 불과해 보였지만, 홍어에게 넘어간 총이 결국 어떤 일을 벌였는지 우리는 보았다. 이 영화에서 총이 발사되는 순간 우리는 영화적으로 각성하게 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영화도 스스로 그러한 것처럼 총격의 순간에 미세하게 번쩍이며 진동한다. 이것은 농담이 아니고 진짜 위험한 사건이 벌어졌음을 각인시키려는 영화 자신의 경련이다.

총기 규제가 엄격하기는 대만도 한국과 마찬가지라는 점에서 비현실적 사물인 총이 영화에 가하는 충격은 이중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세계에 어울릴 법하지 않은 이것은 이야기가 단지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증한다. 이것은 <마작>이 대만의 1990년대를 현실적으로 다루는 허구적 이야기라는 믿음에 근거한다. 그런데 실제로 총이 발사되는 순간 그 믿음은 영화가 그렇게 표현한 것처럼, 섬광과 함께 흔들린다. 이것을 환상이 현실을 향해 폭발하는 순간이라고 말해도 될까. 서로가 서로를 사기 치기에 혈안이 된 영화의 세계가, 세계 속 인물이, 그 증오를, 이야기 내부 핍진성의 원칙을 깨고서라도 현실 세계로 내뿜기 위한 도구로 총이 이용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마작>에서 총은 환상과 현실을 동시에 관통하는 충격이라는 생각을 오랫동안 해 본다.

<마작>은 에드워드 양의 다른 영화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을 떠올리게 하는 면이 있다. 두 영화에 같은 배우들이 다수 등장한다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미성숙한 인물들이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하고 또 반응하는 영화라는 점에서 닮았다. 그리고 인물들의 미성숙함에 영화는 결코 관용을 베풀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두 영화에서 패거리를 이루는 소년과 청년들은 이를테면 전쟁놀이 같은 투닥거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폭력과 범죄를 벌인다. 그리고 그들의 행위를 그저 철없는 짓으로 치부할 수 없도록 두 영화는 중요한 살인을 인물의 손에 맡긴다. 나는 이 청춘들이 무엇 때문에 대립하는지, 무엇을 위해 사기를 치고 해코지를 하는지 도무지 이해하기 힘들지만, 그들이 그 무언가 때문에 행하는 폭력은 분명히 인식할 수 있다.

<마작>에는 “자기가 뭘 하고 싶은지는 아무도 몰라”라는 말이 반복되어 나온다. 실제로 우리는 우리가 욕망하는 대상을 제대로 인식하는 것조차 쉽지 않고, 욕망은 언제나 타자의 욕망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은 더더욱 어렵다. 이 말을 하는 홍어와 홍어 아버지, 그리고 나중에 홍어에게 죽임 당하는 추 이사 역시 타인이 무엇을 원하는지는 고사하고, 자신은 무엇을 원하는지조차 몰랐을 것이다. 세 인물 모두 자신의 욕망을 확신하는 것 같지만 무지 안에서 각자 나름의 파멸을 겪는다. 이것은 어쩌면 거품의 시대에 올라탄 듯 자신한 자들이 치러야 할 대가일 것이다. 대만 경제의 거품. 거품은 그 분위기를 즐길 자유는 허용하지만 그 핵심에 접근하는 것까지는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자본주의라는 거품의 경제학은 마치 그렇지 않은 것처럼, 모든 것이 정합성에 의해 작동한다고 믿는 한에서 유지되는 질서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영화는 사회적 억압과 징후가 이들에게 기입되어 있다는 사회학적 분위기를 만들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들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자각하지도 못한 채 이미 사회에 위험한 존재가 되었음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들이 진정 의도한 건 그게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의도한 것 이상을 행하고 말한다.

다만 두 영화는 청춘의 위험을 누구에게 할당할지에 대해 차이를 보인다. 두 영화에는 공히 무리에서 조금은 떨어져 지켜보는 편입생 인물이 있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 인물에 이입해서 영화를 따라간다. 샤오쓰와 룬룬이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바로 그 인물, 샤오쓰가 살인을 저지른다. 반면에 <마작>에서는 무리의 리더 홍어가 살인하고, 이후 편입생 룬룬은 무리에서 이탈한다. 룬룬은, 진저가 표현한 것처럼 거친 서부극과 같은 대만에 홀홀단신으로 발을 들인 프랑스인 마르트를 구하고 사랑하기 위해 떠난다. ‘사랑하기 위해’라고 한 것은 룬룬의 마르트에 대한 감정이 결심 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마르트에 대해서는 왜 마커스를 떠나 룬룬을 찾는 일을 두 번이나 반복하는가 하는 의아함이 남지만 말이다. 섣부른 도식화이기는 하지만, 세기말의 룬룬이 1960년대의 샤오쓰보다 파국적이지 않은 이유는 사랑하기를 결심하기 때문인 것 같다. 샤오쓰는 억압적 세계에 대한 울분과 증오를 쟁취할 수 없는 욕망의 대상 밍에게 투사한다. 자기 혐오적 행위에 가까운 홍어의 살인도 내부 모순에 결박당한 자의 투사된 폭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파국이 우리에게 던지는 반영적 성찰이 분명 더 의미심장해 보인다. 한편 반면에 다행히 온전히 무리의 세계에 속해 있지 않은 룬룬은 그 바깥의 관계에 눈을 돌린다. 이 차이를 만드는 인물들의 태도를 더불어 생각해 보게 된다. 물론 두 영화에서 밍과 마르트, 그리고 앨리슨이 남자들의 대상으로 갇혀 있듯이, 이것은 20세기 망가진 남성의 일그러진 판타지가 그려내는 세계라는 점을 유념하면서.

<언더 더 스킨>

이 영화는 적절하게 단일한 이야기로 통합하는 데 필요한 이름들을 생략하고 있다. 엔딩 크레딧에서도 인물의 극중 이름은 찾을 수 없다. 극중 스칼렛 요한슨을 로라라고 지칭하는 글이 보일 때마다 나는 의아했다. 이들과 나는 다른 영화를 본 것일까. 장르적 관습에 기대어 그들을 외계인이라고 상정해 볼 수 있고, 이 영화의 원작이라고 알려진 소설이 그들을 분명하게 인간 사냥 노동을 하는 외계인으로 정의하고 있음을 알고 있는 이들은 그렇게 인식하고 지켜볼 것이라는 점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인물의 이름도 알 수 없고 상황에 대한 정의도 없는 이 영화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 외부의 참고점을 통해 이해하는 것만큼이나, 그것이 필요하게 만드는 침묵이 이 영화에 대해 더 말해야 할 대상일 것이다.

나는 영화에 대해 말할 때 오로지 그 영화에 근거해야 한다는 믿음을 갖고 있지만, 사실 이는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저마다의 인식과 욕망, 감정과 감각의 맥락으로 영화의 내적 세계를 마주하기 때문에, 영화에만 근거한 경험이란 순수한 환상에 가깝다. 순수한 환상의 준칙을 지키면서 수행할 수 있는 의사소통은 영화에 대한 우리의 감각 정보를 논하는 것에서 더 나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엄밀히 말해 감각에 대해서조차도 우리는 공통된 언어를 만들기 쉽지 않음을 생각하면, 영화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언제나 영화에 대해 잉여적이다. 그러나 영화라는 존재가 우리의 과잉된 인식에 우선한다. 우리에게는 모든 의미가 허용되지만, 존재와 마주친 출발점을 기입하고 그곳을 돌아보지 않으면 우리는 영화에 대해 말하는 동안 의미의 복잡계 영역에서 길을 잃고 말 것이다.

영화로 돌아와서, 스칼렛 요한슨과 오토바이를 탄 남자는 누구인가. 그들을 외계인이라고 가정해도 다른 의문이 이어진다. 오토바이를 탄 남자는 스칼렛 요한슨과 어떤 관계인가. 남자는 세간의 말처럼 스칼렛 요한슨의 상사인가. 초반에 시신으로 등장한 여자는 누구인가.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과 행위를 하나의 이름으로 규명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여기에는 다른 반례가 충분히 가능하기 때문이다. 남자는 스칼렛 요한슨과 마찬가지로 여자를 유혹하는 남자일 수도 있다. 시신으로 등장하는 여자는 남자가 잡아 온 희생자일지도 모른다. 그들을 외계인이라고 규정하는 것에도 반론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의 시작에 나오는 추상적이고 기하학적인 빛과 원의 형상은 지구로 침입하는 외계 존재의 시각화라기보다 세포의 생성, 생명의 탄생을 은유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가. 알 수 없는 단어를 나열하는 스칼렛 요한슨의 목소리는 외계의 존재가 아니라 로봇의 언어 테스트 과정을 보여 주는 것 같다고 말할 수는 없는가. 그들을 로봇이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그러므로 이 영화를 어떤 명시적인 이름, 분명한 목적론의 체계 안에서 말하는 것은 그 자체로 오류를 범하는 일일 것이다. 이를 경계하면서 이 영화에 대해 말하려 할 때 결국 우리에게 남는 것은 기호와 상징을 해석하고 의미화하는 일이 아닐까. 남성과 여성의 군상 이미지들로부터 성별 구분에 대한 사회 문화적 맥락을 떠올리고, 배우 스칼렛 요한슨의 섹슈얼리티에 반응하는 남성들로부터 여성 혐오의 다양한 양태를 논하는 것과 같이 말이다. 이 맥락 안에서 껍데기만 남은 남자, 껍데기를 벗고 검은 실체를 드러내는 여자는 너무나도 의미심장한 의미를 내포한 이미지일 것이다. 유혹에 이끌리는 남자는 내부가 없다. 반면 강간 당하는 여자는 검은 심연이 파괴된 외부 표면을 목도한다. 이것은 물론 섹슈얼리티의 맥락 안에서 향락적 주체의 파괴적 성격을 상징할 것이다. 조금 더 생각을 이어 간다면, 나는 이 두 이미지가 남자와 여자의 상태를 드러내기보다 그 반대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대상인 그들의 내부 없음과 파괴된 표면, 그리고 검은 심연은 그 일을 저지른 주체를 반영하는 상징이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그런데 이 같은 기호적 가능성을 살피는 중에도 나는 여전히 스칼렛 요한슨의 정체에 대해 궁금하다. 나는 그가 다른 행성이라고 물리적으로 한정 지을 수 없는, 미지의 세계에서 온 타자라는 의미에서 외계인이라는 가정을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존재가 처음부터 남자들과 완벽하게 의사소통이 가능하면서 동시에 막간의 시간 동안은 전혀 감정 없는 것처럼 비어 있는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 잘 믿기지 않아서, 이것이 가능한 재현인지 나는 계속 질문하게 된다. 내게는 그가 인간 여성의 자아를 지닌 것처럼 보인다. 숲속에서 도망치던 그의 얼굴에 가득차 보이는 표정은 인간의 두려움과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이것은 표정과 행동에 대한 내 지각 체계가 일으키는 착각에 불과한 것일까. 이 영화에서 사건의 변곡점이라 할 수 있는 것, 안면기형 남자를 풀어 주는 그의 선택은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영화가 재현하는 그는 도대체 어떤 존재인가. 이 영화를 보는 것은 영화 외부의 이름을 빌리고 싶은 유혹과 그럼에도 파악되지 않는 타자에 대한 의문을 혼란스럽게 견디는 일이다.

<로맨스 조>

이 영화는 아슬아슬하다. 아마도 이 영화에 대해 말하려면 여성을 대하는 방식이 여성 혐오적이라고 비판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남자들이 모두 그렇지 않을지는 몰라도 적어도 영화는 여자를 여성 혐오적 전형성을 떠올릴 법한 위험한 지점에 놓고 있다. 이 영화에서 여성은 억압적 가부장의 그늘에 자리한 어머니이거나 자신을 성적 대상으로 삼아야 하는 일을 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남성의 욕구 불만을 해소하는 구원자의 역할까지 해야 한다.

<로맨스 조>에서 이 유구한 여성 혐오적 전략의 폐해를 얼마간 상쇄하는 것은 개별 여성 캐릭터의 성격이다. 그들은 짓궂고 능청스러우며 생활력 강한 면모를 지니고 있다. 손목에 새겨진 상처 만큼이나 치명적인 사연을 가지고 있지만 그들은 남자들처럼 자신의 이야기에 침잠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 속 여자들은 남자들을 침잠으로부터 끄집어 낼 수 있기도 하다. <로맨스 조>가 보이는 여성 혐오적 전형성이 이데올로기적이기보다 징후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이 캐릭터에 대한 태도 덕분일 것이다.

여성 캐릭터에 대한 태도를 전제로 선해할 수 있다면, <로맨스 조>는 이 전형성의 함정을 인식하면서도 의식적으로 선택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시골 여관에서 시나리오 작업은 하지 않고 다방 커피를 주문한 감독이 바지를 추려 입고 커튼을 닫을 때, 그리고 그렇게 찾아 온 다방 레지가 흥정 끝에 소위 티켓을 끊고 겉옷을 벗을 때 일어나는 불온한 성적 긴장감을 이 영화는 이야기에 대한 욕망으로 전치시키려 한다. 여성 인물이 다방 레지이어야 할 타당함이 어디에 있는지는 여전히 의문에 부쳐야 하겠지만, 이 영화의 주제라고 할 만한 것, 이야기, 서사에 대한 욕망은 이 여관에서의 거래를 통해 리비도, 성충동의 에너지와 동일시되고 이를 대체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야기가 중반에 이를 무렵 다방 레지와 로맨스 조가 동침했음을 보여 주는 장면은 다시금 서사에 대한 욕망이 리비도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상기시키려는 것처럼 보인다. 이 영화는 인간에게 이야기에 대한 욕망은 본질적이라고 말하고 싶어 한다.

로맨스 조와 초희에 대한 이야기, 다방 레지와 엄마를 찾아 다방까지 찾아 온 한 꼬마의 이야기가 그 자체로는 특별하게 매료될 법하지 않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혹적으로 느끼게 만드는 것은 이 이야기를 궁금해 하는 욕망이 영화 안에서 연쇄적인 매개 작용으로 증폭되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이 매혹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화자로부터 청자로, 청자로부터 다른 청자로, 그리고 청자로부터 우리 관객으로 이야기를 궁금해 하는 그 욕망이 전달되면서 에너지는 구르는 눈덩이처럼 커진다. 이 같은, 욕망의 오각형이라 불러도 될 만한 욕망 증폭 장치가 이 영화를 지탱하는 물적 기반이다.

이야기를 매혹적으로 보이게 만드는 욕망의 경제학에 대한 고찰 만큼 유념해야 할 것은 그것을 통합하려는 시도다. 이 영화는 그야말로 누군가가 전하는 누군가에 대한 이야기의 나열이다. 로맨스 조의 친구가 전하는 로맨스 조와의 술자리 일화, 그 친구가 구상하고 있는 다방 레지와 꼬마의 이야기, 다방 레지가 여관방에서 감독에게 전하는 어린 시절 로맨스 조와 초희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영화가 전하는 로맨스 조에 대한 이야기는 각자가 분절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이 영화가 로맨스 조를 둘러싼 하나의 이야기인 것처럼 믿게 되는 것은 각 이야기 속 남자와 여자가 각각 동일 배우로 통합되어 재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화자가 어떤 이야기를 꺼내면 그것을 재현하는 시퀀스가 따라 붙는 것으로 구성된 영화는 인물의 동일성이 익숙해질 즈음부터 아예 화자의 도입부를 생략하고 각 재현 시퀀스를 직접 붙여 놓기도 한다. 영화는 화자의 현실과 재현의 환상 사이 경계를 점점 지워 나가고, 인물과 이야기를 통합하려 한다.

이것이 영화의 욕망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좀 더 나아가 이야기 자신의 욕망에 대한 영화의 응답이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 내적 타당성의 원리 아래 분산된 것을 통합하고 끝내 지속하고자 하는 이야기라는 대타자의 욕망이 이 영화로 하여금 위와 같은 선택을 이끌고 있다고 말이다. 그렇게 볼 때 “우리는 왜 이야기를 해야만 합니까? 이야기가 없는 나는 왜 죽어야 합니까? 이제 그놈의 이야기 좀 그만 하려구요.”라는 로맨스 조의 토로는 영화가 이야기의 욕망에 대해 던지는 영화 자신의 존재론적 질문을 대변한다고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말에 따르면 영화는 이야기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인물과 이야기의 분절 사이에 통합적 질서를 부여하고 환상의 에너지를 끌어 올리며 애쓰고 있지만, 동시에 이야기의 욕망을 원망하고도 있다. 로맨스 조의 말이 영화의 내적 진심이라면, 이 히스테리적 발언을 곱씹어 보는 것이야말로 이 영화의 흥미로운 지점이 될 것이다.

이야기에 대한 영화의 저항. 다방 레지와 초희가 영화적 저항의 수단이라고 할 수는 없을까. 배우 김영필과 이다윗이 동일한 한 남자 로맨스 조를 표상함으로써 이야기의 통합적 세계에 편입되는 동안, 신동미와 이채은은 끝내 다방 레지와 초희로 각자 남아 이야기의 욕망을 거부하고 있는 거라면.이야기의 욕망이 그 둘 모두의 손목에 칼자국을 남겨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이 둘을 묶지 않고 유예시키는 선택을 한 거라면.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이야기에 대한 영화적 승리라고 단정 지을 수 없다. 이야기의 욕망은 언제나 영화가 지닌 균열과 공백을 채우거나 지우려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혹시 다방 레지와 초희가 같은 사람일 수도 있다는 상상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야기의 욕망은 영화가 끝난 후에도 지속된다. <로맨스 조>는 이처럼 인간의 이야기에 대한 욕망과 이야기 자신의 욕망을 대하는 영화의 곤란함을 말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로맨스 조>를 유심히 보면 의아한 장면을 하나 발견할 수 있다. 엄마 찾아 다방에 온 소년이 먼 산을 보고 나면 초희가 어머니에게 자신의 아이를 맡기고 떠나려는 장면이 이어진다. 이 때 초희의 어머니는 앞서 나온 초희의 자살 소동 장면에 나온 배우 서영화가 아니라 신연숙이다. 영화 촬영 과정에서 어떤 캐스팅 문제가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감독의 의지에 따른 것인지 사정은 알 수 없지만 영화는 여기에도 이야기의 통합에 균열을 일으키는 흔적을 남겨 놓았다. 배우라는 뚜렷한 육체적 실체 만큼 이야기 바깥, 그 이상의 것인 예는 없을 것이다. 나는 다만 지금 이 또한 이야기의 결을 거치지 않으면 드러낼 수 없는 인간의 곤란함을 느낀다. 영화 첫 쇼트로 등장한 허상 같은 말 그림이 영화의 심연을 끊임없이 바라보는 이야기의 응시라면, 우리에게 허락된 순수한 영화적 경험의 표현이란 과연 가능한 일인지 의심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