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발터 벤야민의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가장 기억에 남은 문장을 다시 들춰 봤다. 아마도 새 카메라를 사고 나서 오랜만에 사진 찍는 행위로 상기되어 있는 요즘, 무의식적으로 나는 벤야민의 문장을 불러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벤야민의 그 문장은 내 기억과는 조금 달랐다.

따라서 카메라에 나타나는 것은 육안으로 보는 것과는 다른 성질의 것임이 분명하다. 다르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사람의 의식이 작용하는 공간의 자리에 무의식이 작용하는 공간이 대신 들어선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사람들의 걸음걸이가 어떻다는 데 대해서 대충은 얘기를 할 수는 있지만 정작 발걸음을 내뻗는 몇초 동안의 자세가 정확히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거의 알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또 라이터나 스푼을 잡으려고 할 때의 손동작에 대해서도 대충은 알고 있지만 손과 쇠붙이 사이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으며, 더구나 우리가 처해 있는 그때그때의 기분에 따라 그것이 어떻게 변하는가에 대해서는 거의 알고 있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여기에 카메라는 그것이 지닌 보조수단, 즉 하락과 상승, 중단과 분리, 사진진행의 확대와 축소 등으로써 개입한다. 정신분석학을 통하여 충동의 무의식적 세계를 알게 된 것처럼 우리는 카메라를 통하여 비로소 시각의 무의식적 세계를 알게 된 것이다.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발터 벤야민 저, 반성완 편역, 민음사, 1983, 223~224쪽

나는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으로 일반화하여 표현하고 있다고 기억하고 있었지만 벤야민은 정확하게 카메라를 지칭하여 시각의 무의식을 대면할 가능성을 포착했던 것이다.

그리고 더불어 이 문장의 독일어와 영어 문장을 제미나이에게 물어봤다.

so erfährt man durch die Kamera erst vom Optisch-Unbewußten, wie durch die Psychoanalyse vom Triebhaft-Unbewußten.

It is through photography that we first discover the existence of this optical unconscious, just as we discover the instinctual unconscious through psychoanalysis

영어와 독일어 문장에서는 ‘시각의 무의식’이 아니라 ‘광학적 무의식’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나는 모두 훌륭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시각적 경험을 조건 짓는 눈의 광학적 조건을, 그 조건으로서 광학적 원리를 우리는 확장된 눈을 통해 대면한다.

‘질서 정연한’ 법은 정의상 ‘맹목적’이고, 무지하며, 특수한 열정들 위에 일으켜 세워져 있다. 공동체는 궁극적으로, 어떤 특수한 것도 의미하지 않는 한에서 ‘모든 것을 의미’하고 그럼으로써 각각의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그 속에서 그/그녀 자신을 인지할 수 있게 해 주는 하나의 기표를 통해서 결합된다.

天地不仁

…파괴적 성격은 단 하나의 구호만을 알고 있는데, 그것은 공간을 만드는 일이다. 그리고 파괴적 성격은 단 하나의 행동만을 알고 있는데, 그것은 공간을 없애는 일이다. 맑은 공기와 자유로운 공간에 대한 그의 욕구는 어떠한 증오보다도 강하다.
파괴적 성격은 젊고 쾌활하다. 왜냐하면 파괴한다는 것은 우리들 본래의 나이의 흔적을 없애 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파괴한다는 것은 사람을 쾌활하게 하는데, 왜냐하면 모든 것을 없애버리는 것은 파괴하는 자에게는 자기 자신이 처한 상황의 완전한 환원, 아니 자기 자신이 처한 상황의 말살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파괴적 성격은 지속적인 것을 전혀 알지 못한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는 어느 곳에서나 길을 보게 된다.
…또 그는 어디에서나 길을 보기 때문에 그 자신은 언제나 교차로에 서 있다. 어떤 순간에도 그는 다음의 순간이 무엇을 가져다 줄지에 대해 알지 못한다. 현존하는 것을 그는 파편으로 만드는데, 그것은 파편 그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 파편을 통해 이어지는 길을 위해서다.
파괴적 성격은 인생이 살 값어치가 있다는 감정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자살할 만한 값어치가 없다는 감정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중략) 이러한 면이 번역과 원문의 관계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비유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마치 접선이 원을 살짝, 그것도 단지 한 점만을 건드리고 또 이러한 건드림이 무한대의 직선으로 이어지는 접선의 법칙을 규정하는 것처럼, 번역 역시 살짝, 그것도 단지 의미의 무한히 작은 점들만을 건드림으로써 언어적 움직임의 자유 속에서 충실성의 법칙에 따라 그 스스로의 고유한 길을 추적하는 것이다….’

Walter Benjamin <번역가의 과제> 중에서

그의 비유는 무한한 상상력의 영역을 건들면서 그가 말하는 순수한 언어의 영역에 우리 영혼의 직선이 살짝 접하도록 해 준다. 그가 말하는 아우라가, 또는 시각의 무의식적 세계가, 또는 역사적 유물론이 신학과 만나면서 밝아오는 구원의 가능성은 이처럼 잠시 원을 스쳐 지나가기만 하는 하나의 접선이 그 일회적이지만 영원한 순간을 기억하면서 나름의 길을 가는 것과 같다. 그 순간은 결코 머무르지 않으며 섬광처럼 지나갈 뿐이다. 그가 멜랑콜리한 것은 인간은 결코 그 원을 ‘획득’할 수 없기 때문이며 살짝 스쳐 지나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멜랑콜리커의 노스탤지어는 결코 퇴행적이지 않다. 과거가 아름다웠다고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가 원에 접하지 못했음을, 비상사태가 진정한 비상사태가 되지 못했음을, 실패와 패배 속에서 나타나는 바로 앞의 원과 접할 수 있었다는 것의 증명 속에서 쓸쓸히 현재를 과거와 연관시키는 감성으로서 노스탤지어를 지닌다.
과거가 아름다웠다고 느끼는가? 그것은 과거가 너무나도 추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