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실이는 복도 많지>

영화 프로듀서로 일해 온 찬실이는 평생 함께 작업해 온 감독의 돌연사로 한 순간 삶의 기반을 잃어 버린다. 작가주의 영화로 유명한 감독이 떠나고 난 후 뒤에서 실무를 챙겨 온 프로듀서를 찾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찬실이는 즉시 경제적 곤궁에 처하고 소명과도 같던 영화 만드는 일을 지속할 길도 찾지 못한다. 마흔이라는 나이는 이 상황을 더 비참하게 느끼게 만든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는 이처럼 자신을 추동하는 근거를 잃고 삶의 나락에 빠진 찬실이에게 다시 일어서라고 응원하는 영화다.

이 영화가 자기 반영적 연쇄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 있다. 찬실이가 영이에게 거절 당한 후 눈물 젖은 버스를 타고 돌아올라치면 주인집 할머니가 냉해를 입고 죽어 가는 꽃을 보며 “불쌍해라” 말하는 숏이 뒤를 잇고, 찬실이가 할머니의 시를 들으며 어떤 감정에 사로잡혀 눈물을 흘리고 나면 다음 숏에서 소피의 프랑스어 수업 시간에 ‘너도 그렇다’라는 시를 읊는 영이의 목소리가 이를 이어 받는 것처럼, 영화는 스스로 찬실이의 감정을 반영하고 응답한다. 한겨울 잎을 모두 떨어뜨리고 숨 죽은 열매만 가까스로 매달고 있는 모과 나무를 바라보던 어느 외국인은 찬실이가 그 모과를 동일시하도록 이끄는 영화 자신, 그리고 작가의 응시를 전한다. 영화의 구조와 마찬가지로 인물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찬실이의 마음을 살핀다. 귀신 장국영은 그 자체로 찬실이가 사랑하는 대상이 찬실이에게 되돌려 주는 반영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사실을 오직 찬실이만 모른다.

여기서 이 영화의 감흥이 생기는지도 모르겠다. 찬실이가 절망에 빠져 자기 자신조차도 지각하기 힘들 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영화가 찬실이의 욕망을 전개하고 의인화한다. 찬실이는 모르는 찬실이의 마음이 곧 영화이고 그 뒤에 숨은 작가의 마음이 되는 세계에 참여하고 나면 우리는 찬실이를 응원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러나 이처럼 확정된 태도의 세계가 단지 순진한 위로의 결을 넘어서게 만드는 것은 찬실이라는 인물 자체 덕분이다. 찬실이는 본래 자신이 사랑하고 원하는 것을 추구하는 데 진심인 인물이다. 영화를 더 이상 만들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그의 앞에 놓인 폐허가 이를 증명한다. 그런데 찬실이가 맹목적이고 순진한 쾌락원칙 주의자라고 생각할 때쯤 찬실이의 다른 면모를 확인하게 된다. 찬실이를 측은히 여긴 배우 친구 소피가 돈을 빌려 주겠다고 하자 찬실이가 직접 일을 해서 벌겠다고 말할 때부터, 그가 믿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 보고 싶은 것을 추구하는 것은 현실원칙의 문제를 비껴가지 않고 투쟁하는 것과 함께 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 찬실이에게 영화가 알려 주려는 것은 “당신은 이미 당신이 원하는 것을 두고 계속 투쟁할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찬실이를 향하는 이 메시지가 우리에게까지 반영되고 나면 이것을 단지 순진한 자기 승인의 기제라고만 말하고 싶지는 않게 된다. 우리는 투쟁하지 않는 것은 그것대로 치러야 할 대가가 있음을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다.

찬실이가 사랑해 마지 않던 영화의 흔적을 폐기하고 영화 마을을 떠나려고 할 때 귀신 장국영의 눈물과 주인집 할머니의 시가 그를 멈춰 세운다. 지금 찬실이가 떠나려고 하는 그 곳이 갈증의 대상이 아니라 궁금한 대상이 되었다는 자기 고백을 떠올리면 찬실이는 앞선 두 붙잡음으로부터 끝내 자신이 외면할 수 없는 이끌림을 재발견했는지도 모른다. 이를 예술을 통해 인간의 마음을 들여다 보고 싶은 욕망에 대한 근본적인 각성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것만은 포기하고 싶지 않은 찬실이에게 원경험을 새긴 영화 <집시의 시간>이 찬실이를 찾은 순간, 영화처럼 아코디언을 둘러 메는 찬실이를 카메라는 천천히 가까이 다가가며 바라본다. 집도 돈도 남자도 없이 청춘을 보낸 채 지루한 시나리오를 써 내려 가는 찬실이가 영웅적으로 느껴지는 순간이다.

12월 비평의 편지 주제는 ‘집에서 본 영화, 영화관에서 본 영화’였다.(링크) 이 주제에 대해 내가 기대한 바는 사실 발터 벤야민의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다루었던, 극장에서 이루어지는 관람 행위의 사회성에 대한 논의였다. 극장에서 보는 영화만이 영화적 체험의 본령이라고 믿는 사람들의 주장에 대해 나는 언제나 벤야민의 이론을 떠올리며 의식하고 있었다. 벤야민을 사랑하지만 나는 이 이론에 대해서만큼은 반대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니면 내가 벤야민을 오해해 오고 있었거나.

오랜 시간 수많은 시네필로부터 들어 온, 암실(Darkroom) 속에서 거대한 스크린을 바라본다는 것의 고유함과 위대함을 찬양하는 태도는 라이트룸(Lightroom)의 시대에도 다른 환경에서 영화를 보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취향의 편협함에 불과하다. 그러나 벤야민이 말하는 극장이 가능케 하는 집단 관람의 사회성은 다른 문제였고, 그것을 영화의 고유한 체험이라고 한다면 그럴 수 있는 것이었다. 나는 이게 틀린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반박할 수 없었다. 그런 중 이주연의 영화음악에서 이상용이 하는 말을 들으며 영감을 받아 오래 전 트윗한 적이 있었다.(링크) 이를 다시 부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의 역사 초기에는 뤼미에르 형제의 시네마토그래프와 함께 에디슨의 키네토스코프도 있었다. 키네토스코프는 만화경과 같아서, 뷰파인더 같이 작은 창을 통해 작은 암실 통에서 영사되는 영상을 감상하는 장치다. 이것은 오직 한 사람만이 볼 수 있다. 기술복제시대의 초기는 더 많은 관람 전파를 위해 거대한 스크린과 거대한 암실이 필요했고 영화 보기의 방법으로 시네마토그래프가 승리했다. 그러나 디지털 복제가 가능한 현대에 와서는 각자의 만화경, 키네토스코프가 다시 부상하고 있다. 이것이 이상용의 이야기였다.

영화적 환상에 대한 사적 경험이 집단적으로 관계 맺으며 감상과 비평적 태도가 사회적으로 생성되는 것이 영화적 체험이라고 한다면, 암실의 거대한 스크린은 당대의 기술적 한계에서 연유하는 조건이었을 뿐, 극장 바깥 라이트룸 세계의 스크린에서도 그 체험은 가능하다.

24장의 사진이 모여 1초의 영상을 이루고 숏이라는 파편이 모여 총체적 작품이 되는 영화적 형식이 내포하고 있는 것처럼, 영화적 체험은 극장 안에서조차 사적으로 파편화되어 있다. 그것을 집단화하고 사회화하는 기능이 암실에서만 가능하다고 할 이유가 라이트룸 시대에는 없다.

벤야민이 말하고자 했던 영화적 체험, 사적으로 고유하면서도 사회적인 체험은 기술복제가 가능한 예술로서의 영화가 지닌 가능성의 본질이었다.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이지만 그 가능성은 기술복제 자체에 있다. 필름과 극장보다 복제 기능이 더 확장된 시대, 라이트룸 시대, 디지털 키네토스코프 시대라고 할 수 있을 만한 현 시대에 영화적 체험과 그 가능성을 여전히 극장과 암실에서만 모색하고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영화의 가능성을 갉아 먹고 혐오하는 태도가 아닐까.

<시리어스 맨>

<시리어스 맨>의 본편은 대니의 귓구멍에서부터 시작한다. 카메라는 대니의 귓속을 서서히 빠져 나와 라디오로 제퍼슨 에어플레인의 ‘Somebody to Love’를 듣고 있는 대니의 귀를 비춘다. 수업 시간에 몰래 노래를 듣고 있는 것으로도 모자라 대니는 일전에 거래한 대마의 값을 치르려고 집요하게 페이글을 부르다가 결국 선생님으로부터 적발 당하고 라디오까지 압수 당한다. 이처럼 영화는 대니의 곤경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앞으로 지켜 볼 곤경은 대니가 아니라 그의 아빠, 래리의 것이다.

대니의 곤경에 대해 우리는 대니에게 너의 수업 태도 불량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래리에 대해서는 그럴 수 없다. 래리에게 닥친 곤경들에 대해 우리는 래리가 납득할 수 있을 만한 이유를 내 놓을 수 없다. 래리의 곤경은 자신이 선택한 것의 결과가 아니기 때문이다. 반대로 곤경이 래리를 선택했다고 말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대니의 곤경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부터 시작해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나아가 보는 것이다. 히브리어 수업 시간에 몰래 노래를 듣고 있는 대니의 귓구멍에서 솟구쳐 나온 곤경이 만물의 원인과 결과를 연구하는 물리학자 래리에게 불확정적 재난으로 변모하고 나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인과적 설명은 세계 전체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생각에 빠지게 된다.

코엔 형제에게 운명은 선택의 총합이 이룬 결과도 모든 것이 미리 정해진 거대한 결정론의 섭리도 아닌, 우연히 만난 치명적인 어떤 사태다. 그것은 엔트로피의 법칙과 같아서, 의도한 바를 거스르게 만드는 무질서의 운동 자체이며, 일이 꼬이게 만드는 힘이다. 그것은 때로는 자신의 갈길을 막거나 쫓아오는 치명적인 살인마의 모습으로, 때로는 영문도 모르게 발생한 사건의 변수나 곤경의 형태로 나타난다. 일상에 침입하여 주체의 평온을 흩트리는 그것, 그리고 이를 맞닥뜨린 주체의 반응은 코엔 형제의 오래된, 어쩌면 평생을 쏟고 있는 관심사다.

코엔 형제의 영화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가 침입하여 나를 쫓아오고 있음을 암시하는 몇 가지 기호적 장면을 찾을 수 있다. <시리어스 맨>에서 매일 하굣길마다 벌어지는 대니와 페이글의 추격전처럼 직설적인 것도 떠올릴 수 있겠지만, <블러드 심플>부터 지금까지 오랫동안 변주되어 온 벽이나 문의 비가시적 응시 만큼 치명적인 것도 없다. 열기에 녹아 반쯤 흘러 내린 벽지를 가만히 쳐다보거나, 그 너머로 서서히 다가오는 살인자의 움직임을 벽이나 문 뒤로 감지할 때 우리는 그렇게 비가시적이고 설명 불가하지만 분명하게 다가오는 그것을 느낄 수 있다. 이 역사 깊은 벽과 문의 암시는 나로 하여금 카메라가 집 문 앞에서 대화하는 래리를 비추거나, 동료 교수가 연구실 문에 기댄 채 래리에게 말을 거는 구도를 잡을 때 괜히 무언가 불안을 느끼게 만든다.

코엔 형제는 규율과 금지의 봉인이 해제되고 자유로운 주체가 된 현대인이 느끼는 근원적인 불안의 다양한 양태를 다룬다. 모든 것이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에 맡겨진 후 그것의 결과가 전적으로 자기 책임이 된 시대, 이 시대 주체의 불안은 자신의 선택과 행위가 사태와 너무 가까워졌기 때문에 발생한다. 신이 사라진 지금 사태는 운명으로 섣불리 말할 수도 없다. 주체와 사태-운명 사이를 중계하는 타자, 책임을 미룰 수 있는 타자가 사라진 후 사태-운명과 직접 대면하고 그것을 자기 책임 하에서 감당해야 하는 주체는 때로는 어리둥절해 하고 때로는 그것과 투쟁하며 때로는 지쳐 버린다. 그리고 <시리어스 맨>에서처럼 때로는 대상 없는 원망에 빠진다.

아내 주디스가 싸이 에이블먼과 정분이 난 것도, F 학점을 준 클라이브 박과 그의 아버지가 명예 훼손과 학점 구제 사이에서 선택하라고 괴롭히는 것도, 동생 아서가 밖에서 사고를 치기 시작한 것도 래리의 책임 밖에서 벌어진 일이기 때문에, 책임의 전가를 위한 래리의 히스테리가 발생한다. 텅 빈 원망은 사태의 책임에 대한 편집증에서 유발된다. 이것은 어쩌면 코엔 형제가 다룬 인물들이 그들의 영화 세계에서 오랫동안 말 못한 원망의 자기 표현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시리어스 맨>은 코엔 형제의 영화 계보 안에서 가장 솔직하게 자기 반영적인 영화라고 말하고 싶다.

래리의 히스테리적 반응에 대해서조차 코엔 형제는 그가 원하는 대답을 돌려 주지 않는다. 래리에게 닥친 곤경들은 아들 대니의 유대교식 성인식 이후 잠잠해지고 일상이 제자리로 돌아온 것처럼 보인다. 랍비의 조언을 들으며 간신히 견디던 래리에게 이 곤경들은 차라리 종교적 시련과 극복의 과정이라는 교훈으로 지나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안심하는 사이 거대한 토네이도가 다가오고 래리에게 건강에 대해 불길한 전화가 한 통 걸려 오는 영화의 마지막은, 코엔 형제가 인식의 바깥, 윤리와 책임 너머의 영역을 종교적으로 오인하고 승화하려는 시도를 적어도 자신의 영화 세계 안에서만은 허락하지 않겠다는 선언으로 보인다.

감당할 수 없는 것들을 신에게 위임하지 않고, 그렇다면 어떻게 하란 말인가. 이 영화의 처음에 삽입된 짧은 액자 영화에서 부부의 집을 방문한 늙은 랍비가 유령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늙은 랍비의 몸에 송곳을 찌른 아내에게는 단 하나의 분명한 진실이 있다. 그 랍비는 3년 전에 이미 죽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 방문한 늙은 랍비는 정말 유령이거나 그를 사칭하고 있는 중이다. 송곳을 찌르고 랍비를 물리친 아내는 남편과 달리 두려워 할 것이 없다. 그가 근거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분명한 인식이 이 미스테리하고 공포스러운 상황을 불식시킨다. 그러므로 앞선 질문에 대한 코엔 형제의 대답은 이렇다: “당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단순하게 받아들여라.” 가장 솔직하고 자기 반영적인 영화 <시리어스 맨>을 코엔 형제는 어떤 은유나 암시도 쓰지 않고 담백한 이 한 문장으로 시작한다. 의미와 인과, 책임에 대한 강박과 불안으로 고통 받는 인간과 영화 세계의 인물에게 코엔 형제가 그토록 하고 싶은 말이 이것 아니었을까. 믿기 힘들지만 이것은 성실하고 윤리적인 위로의 말이다.

라캉은 “진리에나 신경 써라, 그러면 치유는 저절로 이루어질 것이다”는 영웅적 태도를 목표로 하고 있다. “진리에 직면하라, 모든 것을 걸어라, 결과를 무시하라, 그러면 치유는 저절로 이루어질 것이다.”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


2020년 한 해 동안 영화 리뷰 쓰기 모임에서 쓴 글이 또 책으로 묶여 나왔다. 이 모임이 아니었다면 나는 나를 그 무엇으로도 추동할 수 없었을 것이다. 코로나와 고립, 취약함으로 얼룩진 2020년이 행복했는지 묻는다면 머뭇거리겠지만, 헛되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 있게 해 준 것이 이 쓰기 모임이었다. 깊이 고맙고 자랑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