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피로연

감독 : 이안

출연 : 랑웅, Mitchell Lichtenstein, 조문선(Winston Chao), May Chin, 김소매

우리는 이 세상 위에 홀로 자유롭고 주체적으로 존재할 수 있을 거라고 보통 믿는다. 그러나 실제 이 세상은 그리 녹녹치 않다. 생각보다 세상은 세밀하게 조직되어 있고 어떠한 출구도 만들어 놓지 않은 채 우리로 하여금 그 그물망 사이에 옴짝달싹 못하게 걸리도록 만든다. 그 안에서 우리는 좌절할 것인가 저항할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한 이 영화의 대답은 꽤나 동양적인 색채를 지니고 있는 듯 하다. 대답은 좌절도 저항도 아니고 그 가운데도 아니면서 모호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체념도 아닌 듯한 모습을 취하고 있다.

결혼피로연은 내가 알기로는 이안 감독의 소위 ‘아버지 3부작’ 영화 중 하나이다. 이 영화로 베를린 영화제에서 최우수상을 받고 미국으로 진출했던가. 아무튼 서구 영화제에서 최우수상을 받을 만한 이유가 이 영화 안에는 긍정, 부정이 뒤섞인 채 스며들어 있다.

고위동은 동성애자이다. 그는 대만에서 살다가 좋은 아버지를 만난 덕에 미국으로 건너와 생각보다 풍족한 생활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에게 대만에 있는 부모님은 도입부에 나오는 바벨의 짓누름과 같이 일반과 구별되는 자신의 성향에 대한 강한 억압요소가 되고 있다. 자신이 벗어날 수 없는 부모의 존재는 기존 사회의 조밀한 그물망을 뜻한다. 그는 그 그물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대를 이어주길 바라는 부모의 바램은 그의 성향과 충돌하고 그는 그 바램을 부정해 내지 못한다.

이렇게 하여 이루어진 위장결혼은 묘한 긴장감을 안겨다 준다. 위동의 부모는 위동의 실재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고 마냥 흡족해 한다. 위동과 위위는 다정한 척 하지만 속앓이를 하고 있고 위동의 가시권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않는 그의 애인 사이먼도 불편한 심기를 감추고 있다. 이 묘한 긴장감 속에서 치러지는 성대한 피로연은 일면 흥겨우면서도 나와 사회가 충돌하고 내가 사회에 의해 끌려다니는 피로한 현실을 고스란히 옮겨 놓는다.

‘지금 보고 있는 것은 인류가 오랜 세월 동안 성을 억압해 온 결과입니다.’ 시끌벅적 중국의 피로연 문화에 대한 인류학적 보고서와도 같은 유쾌한 피로연 사이에 툭 던지는 한 하객의 이 한마디는 감독의 심중을 찌른다. 피로연은 유쾌하지만 그 유쾌함은 내가 남을 괴롭히는 데서 오는 쾌감이다. 위동과 위위는 그 안에서 숨막혀 한다. 위위는 영주권 획득을 위해 이처럼 기만적인 일을 저지른 데 대해 마냥 넋나간 듯이 웃어 대기만 하고 위동은 자신의 본모습을 철저히 숨기고 타인들의, 사회의 요구에 억지 부응하느라 기력이 소진한 상태가 된다.

피로연을 치르고 심신이 피로해진 위동의 충격적인 고백 한마디는 위동의 어머니에게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였다. 그녀는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슬픔을 느끼면서도 위동을 질책하고 경멸하지 않는다. 똑같이 위위에 대해서도 증오를 비치지 않는다. 일종의 정이라는 것이 그 화해될 수 없는 차이를 보듬는 것이다. 어머니의 모습은 그렇게 정에 의한 화해의 가능성을 내비친다.

그러나 소위 ‘아버지 3부작’ 중의 한 작품이라면 아버지에게로 관심을 돌릴 법도 하다. 과연 아버지는 어떠한 존재인가. 이 영화의 아버지는 어떠한 인간상을 보여주고 있는가. 거기에 대한 답은 그리 쉽게 나오지 않는다. 몸이 쇄약해진 아버지는 실은 진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는 내색을 끝까지 하지 않는다. 자신이 아는 내색을 하면 대를 이어야 하는 자신의 어줍잖은 의무가 성취되지 않을 것이고 부모와 자식 사이의 관계도 서먹해질 것이며 혼란만을 야기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이유가 기회주의적이고 미운 형태로 보이지 않는다. 아버지는 다 알면서도 눈감고, 체념하지 않으면서도 저항하며 저항하지 않으면서도 절망하지 않을 수 있는 미묘한 지점에 서 버린 것이다.

아버지는 위동에게 고백한다. 그가 군인이 된 것은 부모님이 억지로 장가를 보내려 한 것에 반항하려 가출했기 때문이라고. 그러나 이제는 그가 위동에게 대를 잇는다는 책무를 본의 아니게 강요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는 그것이 절대적인 인간의 의무는 아닌 줄 알면서도 그것을 쉬 무시할 수 없음을 알고 있다. 기존의 질서란 그렇게 쉽게 벗어 던질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다. 아버지는 처자식을 위해, 또는 국가를 위해 힘써 살아오면서 세상에 대해 시달릴대로 시달려 왔고 이제는 병약해진 상태이지만 그제서야 당위와 당연의 차이를 볼 수 있게 된 것이리라. 그 지점에서 그는 기존의 것과 그 반대의 것 사이의 건널 수 없는 강도 무심히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해답은 나왔는가? 그 해답이란 우리가 배워온 것처럼 명확하지는 않은 듯하다. 그것은 머리로서 획득할 수 있는 지식이 아니라 삶 속에서만 체득할 수 있는 지혜이고 대개 그것은 깔끔한 명제의 형식으로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적당히 상투적이고 적당히 볼거리를 제공하면서도 그 안에 삶의 진실을 보여줄 수 있는 지점을 이안도 알고 있는 듯하다. 그가 바라보는 아버지란 서 있는 지점에 함몰되지 않고 그 지점마저 관조할 수 있는 달관자의 모습을 하고 있고 그것은 적당히 마모된 인생 속에서 피로와 함께 다가오는 체득된 지혜에서 가능한 모습이다. 그 안에서 우리는 긍정과 부정을 넘어선 인정과 조화의 순간을 경험한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함께 공항 입구로 들어간다. 이제 다 드러난 진실, 그러나 덮어진 진실 속에서 형언할 수 없는 심정으로 그들을 바라보는 위동과 위위, 사이먼을 뒤로 하고 그는 몸 수색을 받는다. 탐지기를 들이미는 공항 직원 앞에서 서서히 손을 들어보이는 슬로우 모션의 마지막 장면은 – 그것이 일반적인 속도로 찍혔다면 경박한 복종의 모습이 될 것이다 – , 그래서 나에게는 이렇게 해석된다. ‘세상은 나에게 이처럼 강요하네. 이것 말고 저것도 있는데도. 나는 그것만이 옳은 일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네. 세상이 강요하는 그것이 만만한 상대가 아님도 알고 있네. 그 건널 수 없는 강 한 가운데서 나는 다만 손을 들어줄 뿐, 체념도 저항도 아닌 인정의 의미로…’

말로써 다 풀어낼 수 없는 맛이 한문에 스며 있듯 이러한 동양적 인간관에 대해 서구 관객과 비평가들은 매혹당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매혹만으로 충족될 수 없는 맛이 이 영화에도 숨어있는 듯 하다.

이안은 이 영화를 더 나은 조건에서 작업을 할 수 있는 해외로의 진출을 위한 전략적 기반으로 삼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이 영화를 빌어 본다면 그는 위동의 아버지와 같은 심정으로 이렇게 한마디 툭 내뱉을 것만 같다. ‘그건…나도 모르겠네…’

감독 : Krzysztof Kieslowski

출연 : Zbigniew Zamachowski, Julie Delpy

영화음악 : Zbigniew Preisner

굳이 이 영화를 ‘평등’이라는 의미에 천착해서 보지 않더라도, 해석은 매우 용이하다. ‘블루’나 ‘레드’와는 달리 이 영화는 장르적 틀 안에서 전개되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그나마 번역이 수월했던 영화.

평등 : 폴란드인 카롤이 프랑스인 도미니끄와 결혼하고 프랑스에 거주하며 결혼생활을 하는 동안 그는 일종의 성불능 상태에 놓인다. 이는 계속 지켜보면 심리적 억압이나 위축에서 기인한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성적 쾌락을 충족시켜주지 못했다는 이유로 프랑스인 도미니끄가 이혼을 하려 하는 데에는 볼품없고 기백없고 발기도 잘 되지 않는 왜소한 카롤에 대한 못마땅함이 개입되어 있는 것이다. 카롤은 도미니끄로부터 버림받은 후 비참한 모습으로 프랑스 거리를 떠돈다. 그는 처절하게 폴란드로 돌아가 독하게 돈을 모으고는 위장 장례식을 치르고 유산을 도미니끄에게 넘겨준다. 그러나 그것은 예전의 멸시에 대한 복수였다. 자신이 처했던 위축된 상황, 왜소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고스란히 도미니끄에게 경험시키기 위한 계략이었다. 카롤의 살해 혐의로 옥살이를 하는 도미니끄는 그제서야 깨닫는다. 동등한 위치에 서서 서로를 존중하는 것만이 사랑이라는 것을. 진정한 평등 하에서의 관계란 어떠한 심리적 위축감도 개입될 수 없는 것이라는 점을. 카롤은, 경제적으로 부유해진 카롤은 도미니끄 앞에서 위축될 것이 없었다. 그때서야 비로소 그는 도미니끄에게 오르가즘을 선사해 줄 수 있었다.

병을 넣으려는 노파 : 자기 키보다 조금더 높은 위치의 구멍으로 병을 넣으려 애쓰는 한 노파는 ‘블루’, ‘레드’에도 나온다. 항상 이 노파는 주인공에 의해 관찰되고, 정확한 기억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노파를 지켜보던 주인공은 웃음을 잠시 머금으며 관조하다가(동시에 자신에 대한 관조? 자기의식과 동시에 운명에 대한 선택의 순간?) 문득 작은 결심을 하게 된다. 이렇게 같은 장면으로 비슷한 심상과 전환 효과를 내면서 이 노파는 세 영화를 이어준다.

비둘기 날개 소리 :

하나 — 이 영화에서는 줄곧 비둘기는 보이지 않더라도 비둘기 날개 소리가 주인공 주변을 맴돈다. 나의 작위적 해석을 듬뿍 가미한다면, 이 음향 장치는 주인공의 감정이나 사고의 전환과 처한 입장의 변화 등이 일어날 때 그것을 감각적으로 체크할 수 있도록 설정된 것 같다. ‘블루’에서는 잠시간의 암전이 일종의 소격 효과를 일으키며 관객의 몰입을 저지하고 생각을 정리할 여지를 부여한다. 이 음향 장치는 관객이 내러티브의 전개에 대한 이해를 돕는 장치이자 앞으로 일어날 인물의 변화 양상에 대한 예측을 유도하여, 감상의 용이함을 도우면서도 동시에 관객의 능동적 감상을 안내하는 것, 다시 말해 감상의 용이함과 불편함을 동시에 유발하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말고)
둘 — 엇갈렸던 두 인물의 위상이 일치되는 지점? 카롤에게는 위축되었던 심리가 극복되는 순간, 도미니끄에게는 카롤의 위에서 그와 동일선, 또는 그 아래로의 위치 변화…평등이라는 관계가 성립되는 찰나의 순간? 평등이란 한 번 성립됨으로써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각자의 위상의 변화 사이에 잠시잠시 이루어지는 순간적 상황?
셋 — 아니, 첫장면에서 카롤은 법정에 들어서는 순간 비둘기의 똥 세례를 받는다. 평등의 상태가 무너지는 상황을 뜻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위의 허접 해석과 정반대로 비둘기는 평등의 균열상태를 뜻하는 것인가?(한 번 보고는 절대 섣부른 판단 불가)

프라이즈너의 음악은 여기서도 빛을 발한다! 프랑스에서의 클래시컬하면서도 현대적 느낌의 음악, 폴란드에서의 민요풍 흥겨운 음악…그러나 정성일 씨에 의하면 음악이 흐르는 순간 그 장면은 이미지의 진실을 회의케 하는 픽션적 성격이 덧입혀진다고 한다…(이해하기 힘듬)

타인을 존중하지 않고서 자신이 존중받기를 원할 수는 없다. 상호간의 존중이란 동등한 위치에서만 가능하다…

순애보

감독 : 이재용
출연 : 이정재, 다치바나 미사토
(영화음악 : 조성우)

무더운 여름이라는 시간에 서울과 일본이라는 두 공간에서 우인과 아야가 살고 있다. 그 둘은 서로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 같지만 동시에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과연 어떤 관계일까? 이 물음을 애써 처음부터 지고 감상이라는 달음질을 시작할 필요는 없다. 지루하고 답답하거나 그 어느 것 하나 애정을 둘 만한 곳이 없는 그들의 여름날의 장면들을 차근차근 묘사하는 대로 따라가 주기만 하면 된다.

우인은 부모의 살림이 그런대로 넉넉해서 떡하니 자기 집이 하나 있지만 그런 안정감 속에서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남자다. 무감각이라는 그의 병은 왼쪽 새끼손가락의 신경이 마비돼 있다는 설정에서 공식적으로 표명된다. 그는 즐거움도 슬픔도 느낄 수가 없다. 삶에 대한 사랑을 잃어버린 것이다. 자신을 사랑하는 법도 타인을 사랑하는 법도 놓쳐 버렸거나, 아니면 일부러 놓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의 일상은 찌는 듯한 더위 아래 눌려 탈진해 버린, 수분이 다 빠져 축 늘어진 고목과도 흡사하다. 한편 무기력한 그는 타인과 대화하는 법을 모른다. 아니, 이또한 스스로 의사소통이라는 선물을 던져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아내를 잃어버린 매형이 혼자만의 집 안에 들어오는 것도 탐탁치 않아 하며 심지어 중국 화교들의 모임에서는 한국 땅에서 중국 말밖에 할 줄 모르는 이방인들에게 노골적인 주정을 하며 대화를 거부한다.
그러나 대화의 통로를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다. 현실에서 대화하는 통로를 버린 대신 판타지의 영역에서 그 통로를 찾으려 한다. 그는 미아를 훔쳐보며 애를 태우면서도 정작 그녀 앞에서는 떳떳치 못하고 실제 섹스에서는 발기도 되지 않으면서도 그 결핍된 욕구를 인터넷 포르노 사이트를 통해 위무하려 한다. 이렇게 현실에서의 결핍을 판타지에서 충족시키려 하기 때문에 판타지의 통로는 일방적이다. 이는 우인의 소심함을 드러내 주는 것이지만 확대해석하면 인간성이 현실 속에서는 박탈된 듯한 느낌을 주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그리고 이를 더 확대해석하면 현대인의 표상으로서 받아들일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그의 애처롭고도 답답한 일상은 일종의 자기연민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한편, 아야는 죽고 싶어 한다. 그것은 특별한 이유가 없는 듯 하나, 사거리 한 가운데서 각기 다른 방향으로 흩어지는 아야 가족의 아침은 피상적으로나마 그 이유를 시사한다. 아야 또한 대화가 끊겨 버린 가족 안에서 답답함을 느끼는 듯하며 그녀의 유일한 안식처였던 할머니마저 부재한 상황에서 더 이상 그녀는 삶에 대해 애정을 가질 이유가 없어졌는지도 모른다. – 그러나 이에 대해 나는 뚜렷한 물증을 확보하기가 힘들다. 사거리에서의 흩어짐이나 할머니에 대한 사랑과 상실은 그 상태를 제시해 주는 표식일 수는 있으나 자살 충동에 대한 서사적인 이해를 위해서는 역부족이다. – 어쨌든 그녀는 죽은 할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의지로 숨을 참아 죽을 수 있기를, 특히 자신이 태어난 날, 아니 그것이 자신의 생일인지 그 전날인지 구분하기 힘들 날짜 변경선이라는 공간 – 시간의 영역을 혼란케 하는 공간 – 에서 죽을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알레스카행 비행기를 타고 날짜변경선을 지날 때 숨을 참고 죽기로 계획하고 경비 마련을 위해 일자리를 찾던 중 우연히 인터넷 포르노 사이트를 운영하는 작은 회사를 찾는다.
이전의 일자리에서 알게 된 리에라는 여자는 아야에게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인물이다. 그녀는 아야에게서 사라진 삶에 대한 희망이 남아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아야에 삶의 전환점을 제공해 줄 수도 있었지만 애써 그 연결점은 생략되고 죽음행 비행기에 그녀를 태워 버린다.

이 두 인물은 엇비슷한 모습으로 우리를 비춘다. 다른 두 공간에서 살고 있지만 그들의 삶은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인간의 결핍적인 모습을 공유한다. 타자와의 고리에서 떨어져 나와 원자화되고 심지어 고립되어 버린 삶, 나 자신에 대한 애착마저 사라져 버린 건조한 자아. 그러한 이유로 이 두 인물을 인터넷이라는 매체를 통해 하나의 인연으로 엮을 명목은 어느 정도 마련된다.

명목은 만들어졌다. 그 명목을 발판으로 그들을 엮어가는 이야기를 풀어놓을 차례가 된 것이다. 그러나 그 둘을 엮어가는 과정은 찾아보기 힘들다. 우인은 단지 미아와 닮은 그녀를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관음적으로 훔쳐보았을 뿐이고 아야는 98년 수학여행 때 경복궁에서 우인과 같이 사진 찍었던, 인연도 아닌 우연만이 있을 뿐인데 우연히 같은 비행기를 타고 어디선가 본 듯한 서로를 본 순간의 그 ‘필’로 그 둘은 비약적으로 엮여 버린다. 그 필이라는 것이 실제에서도 간혹 일어나기는 하지만 영화에서 그것을 필로서 인정할 수 있도록 풀어내려면 사전 준비가 탄탄했어야 할 터인데 말이다. ‘이렇게 우리들의 이야기는 시작됐다’라는 마지막 내레이션이 소통과 애정, 상실된 자아의 회복을 표방하는 것이라면 그 자기 극복을 가능케 하는 동기가 충분히 개진되어야 하는데도 말이다.

무언가 미심쩍은 부분이 있지만 이 두 인물의 개별적인 모습을 그려내는 데에는 일단 성공을 했던 이 영화는 – 적어도 나는 그들 일상의인 단면들을 가지고서도 충분히 그들에게 동화될 수 있었다 – 마지막 결정타에서 진을 다 빼 버린다. 무더운 여름의 시간에 지쳐 버린 것일까.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향해 떠 버린 이 영화는 본 지 약 30분이 지난 지금에 허탈함을 안겨 준다.
그러나 이 영화가 품고 있는 톤은 강하게 각인된다. 우인과 아야를 장식하기만 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데에는 결과적으로 소홀했던 장면들이라 할지라도, 징후로서 기능하는 선에서는 훌륭했던 장면들 – 예컨대 우인의 마비된 손가락을 비추는 몇몇 장면이나 텅 빈 수영장을 부유하는 아야의 장면, 모니터 속의 아야를 바라보는 우인과 촬영 세트에 갖혀 있다 창 밖으로 뛰어 내리는 아야의 꿈 같은 것들 – 과 대사들, 그리고 조성우의 음악은 잡히지는 않지만 어른거리는 이미지들을 만들어 놓는다. 그것들을 통해 나는 최근에 본 멜로영화, ‘나는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보다는 이 영화를 한 수 위로 두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