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디오로 보고 아직 정리도 되지 않았는데 바로 써 버린다.(또 볼 게 있어서…)

저번에도 말했던 군에서 만났던 형이 Identity라는 걸 말하면서 예로 든 영화가 이 영화였다.

내가 나라고, 나와 동일하다고 인식하는 게 아이덴티티(자아 동일성) 아닌감. 그런데 그걸 이해하는 게 처음에는 너무나도 힘들었었다. 그 때 이 영화의 모티브는 그 이해를 도와 주었다.

정말로 나와 똑같은, 그러나 다른 내가 또 있다면…? 나와 똑같기는 한데 내가 보기에 그건 내가 아니라면? 말이 점점 꼬이는 것 같다. 그러니까 내가 나라고 인정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그렇다면 아마도 누구든지 혼란의 늪에서 헤맬 것이다. 그리고 그 혼란 끝에서 해답을 찾지 못하면 나라는 자아는 무너질 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베로니끄는 또다른 자아를 받아 들인다. 그녀는 같은 날 다른 곳에서 태어난, 또하나의 자신일지도 모르는 베로니카를 은연중에 느껴왔고 최후에는 베로니카를 베로니끄 안에 받아들이고 하나됨에 이른다.

그 두, 아니 한 여인의 중심에는 알렉산더(?)라는 인형극을 하는 남자가 있다. 그 남자는 자신의 소설 속에 다른 곳에 존재하는 두 여인에 대한 이야기를 담는다. 그것은 어쩌면 베로니카의 이야기일 것이다. 다시 말해 베로니카는 그 소설 속의 인물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키에슬로프스키가 이 다층적인 해석의 가능성을 지닌 영화를 통해 무엇을 이야기하려 했는지는…아직 잘 모르겠다. 정리를 못했다. 어렴풋이 유럽의 현실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다라고 짐작은 해 보지만 더 생각해 봐야 할 일이다.

이 영화의 느낌을 말하자면…영화 전체에 입혀진, 한편으로는 처량한 멜로디의 음악과 무언가를 찾아 헤매는 베로니카의 여정이, 슬프고 절박함의 느낌을 풍겨내는 것 같다.

어딘가에 숨어 있는 듯한 슬픔과 관능적인 미를 겸비한 것 같은 이렌느 야곱의 매력과, 투명한 공에 굴절되어 비치던 거리의 장면과 스포트라이트 안에서 살아 움직이듯 애잔한 몸짓을 보여주는 인형극의 그 긴장된 장면, 그리고 그 제목 모를(알아 봐야지) 멜로디의 음악이 내 눈 앞의 이미지가 되어 지워지지 않는다.

All About My Mother Todo Sobre Mi Madre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
cast-세실리아 로스 Manuela 마리사 파레데스 Huma Rojo 칸델라 페냐 Nina
안토니아 산 후앙 ‘La Agrado’ 페넬로페 크루즈 sister Rosa
101분 스페인/프랑스 1999년 제작

이 영화는 여성(정확히는 여성성)에 대해 찬미하며 편견에 대해 저항하며 인간에게 희망을 준다.
생명을 아끼고 새로운 생명을 만드는 어머니의 위대함을 이렇게 보여줄 수 있다니. 이런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여성이 되고싶어 성전환을 한 남성, 임신을 하고 에이즈에 걸린 수녀가 나오는, 그러나 그것에 대한 편견과 거부감은 가질 수가 없게 하고 오로지 인간으로서의, 여성으로서의 그들만이 있도록 – 어떤 과장이나 억지 몰입도 없이 – 할 수 있는 영화가.

세 명의 에스테반을 사랑하고 잉태하며 보듬는 마누엘라나, 모두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해 산다는 성전환자 아그라도나, 타인을 위해 봉사하고 창녀를 감싸며 방황하는 성전환 남성의 아들을 잉태하는 수녀 로자나…이 영화에 나오는 모든 여성에게서 알모도바르가 보내는 구원의 이미지가 느껴진다.

알모도바르는 엔딩 자막에서 여자 연기를 하는 여자배우, 남자 배우와 나의 어머니에게 바친다라는 글을 남긴 것처럼 모든 여성성을 지향하는 이에 대해 찬미한다. 그는 진정 여성성 안에 있는 인간의 가치를 아는 것 같다.

감동 먹고 눈물 좀 글썽거렸다. 참 드문 일이다.

가뜩이나 머리에 든 것도 없는데 더더욱 머리로 쓰기가 싫다. 다른 이가 머리와 가슴으로 쓴 글을 영화 이야기 탐색 게시판에 올려놨으니 관심있으면 그 글을 읽으시라…

감독·이마무라 쇼헤이, 촬영·코마츠바라 시게루, 음악·시니치로 이케베
주연·야쿠쇼 코지, 시미즈 미사, 츠네타 후지오
97년 깐느영화제 황금종려상
이마무라 쇼헤이
별칭 今村昌平      출생일 1926
간장선생, 우나기(각본 겸), 일본곤충기, 인류학입문, 인간 증발
신들의 깊은 욕망, 복수는 나의 것, 나라야마 부시코, 도둑맞은 욕정
끝없는 욕망, 형, 돼지와 군함,붉은 살의, 호스티스가 말하는 일본전후사
마귀환병을 찾아서, 가라유키상, 좋지 않습니까, 뚜쟁이, 검은 비

세진이 녀석이 요즘 혼자 영화를 보고 있다. 내가 술 마시고 하숙집에 들어오면 꼭 이 녀석은 담배 하나 물고 비디오를 보고 있다. 배신감이 느껴진다. 혼자 삶의 질을 높인다며 열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우나기’를 세진이 없을 때 혼자 보게 되었다.

이 영화에 대한 사전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보기 시작했다.(영화에 대한 글을 읽어는 봤었다. 안 본 영화에 대해서는 기억을 못해서 문제이지…) 오프닝 크레딧에 감독과 주연 이름이 뜨기까지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가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 작품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기억해 낼 수 있었다. 그리고 쇼헤이가 ‘나라야마 부시코’를 만든 감독이라는 사실을 곧 기억해 내었다.

영화는 불륜을 저지른 아내를 죽이고 자수하여 제발로 교도소로 갔다가, 8년만에 가석방되어 바깥 세상에 나온 야마시타(쉘위댄스의 바로 그 남자!)라는 중년 남자의 이야기이다.

영화는 전체적으로 차분하게 전개된다. 누군가로부터 계속 아내의 불륜을 알리는 편지를 받던 야마시타. 평소에 즐기던 낚시를 일찍 끝내고 집에 와서 그 불륜현장을 목격하자 잔인하게 살인을 하게 된다. 우리 영화 ‘해피엔드’에 나오는 살인 장면보다 더욱 현장감(?) 있는 이 씬은 차분하던 흐름에 작은 자극이 된다. 작은 자극이라 함은, 몇 초의 긴장 후에는 다시 조용히 제 발로 경찰서로 찾아가는 야마시타가 있기 때문이다.

야마시타는 8년간의 복역 후 2년간의 가석방 판결을 받고 바깥 세상에 나온다. 그의 보호자를 따라 온 한적한 시골에서 그는 모아놨던 돈으로 이발소를 차리고 조금씩 세상에 적응한다.

그에게는 유일하면서 유별난 친구가 하나 있다. 바로 뱀장어이다. 그는 스님 이외의 사람에게는 절대 말하지 않는다. 그는 뱀장어와 말한다. 인간과의 소통을 끊어버렸던 것이다. 그토록 사랑했던 아내에게 배신을 당한 후부터 사람을 믿지 않기로 했던 것이다.
그런 그에게 한적한 시골 마을에서 만난, UFO를 찾는 소년과 옆집 목공수, 껄렁한 놈팽이, 낚시꾼 등은 울타리 바깥 세상을 향해서 내놓은 작은 쥐구멍 같은 존재들이다.

그러던 어느날  야마시타는 약을 먹고 풀밭에 쓰러져 있는 여인을 발견하고 그녀를 구하게 된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그녀, 케이코와 같이 이발소에서 일하게 된다.
케이코는 상냥하고 씩씩해서 이발소는 물론, 마을에서 없어서는 안될 존재가 되고, 야마시타에게 호감을 가지게 된다. 그녀가 손가락을 다쳤을 때 그녀를 걱정하며 급히 병원으로 가 응급 치료를 받게 해 준 야마시타에게, 케이코는 마음을 더욱 키우지만 야마시타는 과거의 굴레에서 못 벗어나고 그녀를 멀리하기만 한다.

케이코에게도 자살을 하려 했을 정도로 괴로운 과거가 있었다. 자신의 어머니가 지니고 있는 돈에만 관심이 있는 유부남 애인, 그리고 자신의 애인에게 욕정을 품는, 정신병에 걸린 어머니 사이에서 그녀는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케이코에게 다가가는 야마시타의 마음은 케이코의 과거가 야마시타의 현재에 들어올 때에 비로소 야마시타 자신과 화해하게 된다. 케이코의 옛 애인이 케이코가 가로챈 돈을 빼앗으러 야마시타의 이발소로 들이닥쳤을 때가 바로 그 순간이다. 주먹다짐이 오가며 실랑이가 벌어지고, 케이코가 밴 아이에 대해 옛 애인이 당황해 할 때, 야마시타는 자신의 아이라며 거짓 선포를 하고는 그렇게 케이코에 대한 사랑을 고백해 버리는 것이다. 케이코의 실수로 새게 머리를 얻어맞는 순간 야마시타는 비로소 과거의 악몽에서 자유로와지고, 현재의 자신과 화해하고 케이코를 받아들이는 경종을 들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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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한바탕의 소동이 벌어지고서야 화해는 이루어진다. 그리고 케이코는 다시 교도소로 들어가는 야마시타가 돌아올 때까지 뱀장어의 운명과도 같은 아이와 함께 진실된 마음으로 그를 기다리겠노라 한다.

뱀장어는 적도까지 가서 암컷이 산란을 하고 씨도 모르는 수컷에 의해 수정이 되어 태어난다. 그렇게 태어난 뱀장어는 일본 열도로 돌아와 살다가 다시 바다를 향해 갈 것이다. 이 뱀장어의 여행은 야마시타와 닮아 있다. 기나긴 여정을 거치고서야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듯이 야마시타의 화해하지 못할 과거도, 소통하지 못할 인간도 그만큼의 ‘앓음’이 있고서야 비로소 화해와 소통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마무라 쇼헤이는 ‘나라야마 부시코’에서처럼 이 영화에서도 인간의 삶과 동물의 삶을 병치시킨다.

사실 나는 나라야마…를 굉장히 지루하게 보았다. 그 영화는 고립된 산골에 사는 특이한 형태의 인간 집단을, 동물과 비유되는 인간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나는 이런 영화 잘 못 본다. 나는 영화를 보면 감정이 먼저 몰입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나라야마 부시코’처럼 무감정으로 인간을 보지는 않는 것 같다. 감독은 야마시타의 삶에 깊숙히 들어가서 그의 삶이 이루는 화해를 지켜본다. 바깥이 아니라 안에서말이다. ‘나라야마…’에서는 동물처럼 교미하는 듯한 남녀의 성교가 있었지만 ‘우나기’에는 교미 행위 바깥에서 이루어지는 – 인간만이 할 수 있는 – 남녀 사이의 사랑이 담겨 있고 한 삶의 번뇌가 있으며 사람 사이(人間)의 소통이 있다.

일본 영화에서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것이 있다. 바로 절제라는 것이다. 일본 영화나 만화(특히 아다치 미츠루의 작품들)는 큰 기복이 없다. 감정이 과장되지도 않으며 사건도 돌발적이거나 크게 놀랄 만한 것이 별로 없다. 이 영화도 그러하다. 이 영화에서 사건들은 튀지 않고 잔잔히 흘러간다. 기교도 특별히 없다. 철저히 자제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밋밋한 것 같지만 또 그렇지 않다. 절제되어 잘 정돈되어 있는 정서적 카타르시스가 더욱 크다는 것을 느낄 정도이다. 이 감독도 참 인간에 대해 따뜻한 시선을 품고 있는 사람이구나라는 것을 느끼며 영화를 일본음식처럼 은근히 곱씹게 된다.

마지막 한마디. 케이코 너무 예쁘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