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폴 토마스 앤더슨
제작 : 조안 셀러 (뉴라인시네마)
각본 : 폴 토마스 앤더슨
촬영 : 로버트 엘스윗
음악 : 존 브리언
주연 : 톰 크루즈, 줄리안 무어, 제레미 블랙만, 제이슨 로바즈, 윌리엄 H. 메이시

2000. 07.
나는 지독히도 게으르고 단순해서 한번 나태의 늪에 빠지면 헤어나오지를 못하고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나태의 최고치까지 치닫고는 한다.
오랜 나태의 시간을 지나온 나는 오랜만에 책을 들고, 또 영화를 보면서 그 돌파구를 찾기로 했다.
그 첫 테이프를 끊을 영화로 나는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매그놀리아’를 선택했다. 이 영화에 대한 사전정보도 미미했고 이 감독의 전편을 접하지 않은, 백지 상태에서 하나하나 채워나가자며 선택한 것이었다.
‘매그놀리아magnolia’. 사전을 보니 ‘목련속의 나무’라는 것 이외엔 다른 뜻이 없는 것 같다. 그럼 이 영화는 목련, 화훼에 관한 영화인가? 터무니 없는 생각도 해 보지만 영화의 도입부는 전혀 목련과 관계가 없는 듯하다. 영국의 그린베리 힐에 사는 약사가 괴한들에게 살해당했는데 그 괴한들 이름이 그린, 베리, 힐이었다, 부부싸움이 잦은 부모의 아들이 자기 인생을 비관하고 옥상에서 뛰어내렸는데 마침 1층에 쳐져 있던 그물 덕에 살 수 있었으나 부모의 싸움이 지겨웠던 나머지 어떻게든 되라는 식으로 장전해 놨던 총이 하필 그 순간 발사돼 그 아들이 죽고 말았다, 뭐 이런 믿을 수 없는 우연의 일치, 웃을 수도 울 수도 없고 쭈뼛 소름이 돋는 이야기가 영화를 여는 문이라니. 그럼 이 영화는 세상사 믿을 수 없지만 있을 수도 있는 우연의 사건, 기묘한 일치의 순간을 포착하려는 건가.
당황하고 있던 차에 영화는 시작됐다.
그런데 한 20분을 보고 나니 이건 주인공이 없다. 아니, 주인공이 어림 잡아도 열 명은 넘는다. 이런 저런 사람들의 모습을 병치시키며 나열하는 건 마치 로버트 알트먼의 ‘숏컷’을 보는 듯했다. 원래 게을러서 이런 식으로 집중하고 꾸준히 스크린을 따라가며 하나하나 머리속을 정리하면서 봐야하는 ‘숏컷’에 매우 고전해 본 전력이 있던 나는 지레 겁을 먹게 됐다.
‘엇! 이거 만만치 않은데. 아무래도 새롭게 시작하는 마음으로, 가볍게 첫발을 내디딜 만한 영화가 아니다’라는 후회와 두려움이 밀려 오면서 내 머릿속은 복잡해져 갔다.
암에 걸려 죽어가는 노인 얼, 그의 아내, 얼을 보살피는 호스피스, 그리고 노인이 버렸던 아들, 암에 걸려 죽어가는 퀴즈쇼 사회자, 그에게 성폭행을 당했던, 지금은 마약으로 망가져가는 딸, 자신의 직업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경찰, 퀴즈쇼 출신의 영재였던, 그러나 지금은 별볼일 없는 놈, 지금 퀴즈 쇼에서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꼬마, 그리고 그의 아버지. 이런, 도무지 정리가 안되는군.
하지만 시간이 계속 흐르면서 가닥이 잡혔다. 이건 퀴즈쇼라는 얼개 속에 묶여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슬픔과 고뇌를 끊임없이 나열하는 식이었다.
등장인물들은 모두들 서로를 배신하거나 당하고, 증오하고 후회한다. 죽어가는 노인은 그의 아들을 버렸던 과거에 깊은 후회를 하고, 돈을 보고 결혼했던 그의 후처는 뒤늦게야 자신이 노인을 사랑하고 있음을 깨닫고, 아버지에게 버림받고 홀로 일어선, 여자꼬시기를 가르치는(?) 그의 아들은 아버지에 대한 증오와 원망을 간직하고 있고…그리고 호스피스는 얼의 부탁을 따라 아들을 불러 화해시키려 하고…이 죽어가는 노인의 집안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러한 이들의 애증 관계는 영화가 진행되면서 점점 절정에 달하고 폭발하고, 풀고 화해하거나 종결된다. 특히 한 노래를 부르는 등장인물들을 돌아가면서 보여주는 시퀀스는 그 화해와 종결의 실마리를 잡는 순간을 하나의 시공으로 포섭한다. 이런…눈물이 찔끔 나는군.
영화 속 대사처럼 인간은 과거를 잊지만 과거는 그를 잊지 않는 것처럼, 자신이 쌓아놓은 과거의 무게 속에 신음하던 이들이 이 노래와 함께 그 중압감에서 잠시나마 벗어나는 것 같았다.
어쨌든 기막히게 연결된 애증의 고리 속에 그 고리들이 새로운 고리를 형성할 절정의 순간이 그 이후 벌어진다. 바로 개구리 비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이런 일도 일어날 수 있군. 정말 대사처럼 이런 일도 일어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듯이 하늘에서 터무니없이 개구리들이(그것도 큼지막한 황소 개구리들이) 떨어진다. 고뇌하는 이 사람들을 용서한다는 하늘의 계시인가? 하여튼 떨어진다. 황소 개구리가 떨어지는 동안 이들은 화해하거나 용서하고 참회하고 새로운 사랑을 싹틔워 나간다.
아, 머리가 아프다. 도대체가 나는 이렇게 복잡하고 긴 영화는 왜 골라서 고생을 한 건지. 하지만 그 감동은 만만치 않은 양인 것 같다. 새벽을 오래 넘긴 시간까지 눈을 말똥거리며 매그놀리아에 대한 글들을 뒤적거리는 걸 보면 말이다.
사람들이 사는 인생이란 다 그런 것 같다. 서로 많이들 상처를 입히고 받으며 그 자욱들을 남기며 살아가는데 그 뒤를 돌아볼 여유가 없나보다. 그러다 어느 순간 자신의 자취들을 돌아보다 문득 후회가 될 때, 그 때 ‘나는 뭘 했던가?’ 가슴에 사무치도록 후회해도 이미 어마어마하게 쌓인 자욱들의 무게는 쉽게 떨쳐낼 수 없다. 길거리를 가다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의 무표정함 속에도 그들 나름의 상처와 후회를 안고 그것들을 조금씩 부풀리며 사는 것 같다. 그 쌓인 짐들을 조금씩이나마 덜어낼 여유가 있다면…
이 목련꽃 영화는 그렇게 무거운 짐을, 그것도 한 사람도 아닌 열 명 남짓의 무게를 담아 보여주고 그것을 한번에 덜어주면서 화해의 꽃망울을 피우는 것 같다.

참, 인상깊었던 한 녀석을 등장인물 중에서 빼먹었다. 살인용의자를 경찰에게 넌지시 랩으로 띄워주고 자살하려던 얼의 후처를 발견해 살렸던 그 흑인 꼬마. 하나의 예언자, 화해와 구원의 이미지가 문득 느껴지는데…
모든 어린이들을 천사로 보는 건 위험하지 않다고 화를 내며 말하던 윌리엄 H. 메이시의 대사가 그 흑인 꼬마에게 오버랩되는 건 왜일까…?

이번에 드디어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를 봤다. 모두들 보고싶은 영화는 극장에서 보는 편인데 유독 나는 돈도 별로 없고 같이 보러 갈 사람도 없다는 명목으로 보고싶은 영화마저도 비디오로 보는 경우가 허다하다.

여러 매체를 통해 류승완이라는 감독과 영화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에 대해 들어왔다. 어려서부터 이소룡의 열렬한 팬이었으며 성룡이 나오는 영화는 절대 놓치지 않을 정도로 홍콩 액션영화에 취해 있었던 그는, 대개 진정한 딴따라나 B급 영화 감독으로 불리운다.

여기저기 조감독으로 영화판을 돌아다니던 그는 이번에 저예산으로 그의 작지만 원대한 꿈 하나를 이루었다. 그가 만든 단편 3편과 새로 찍은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부분을 연결하여 장편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를 완성해 낸 것이다. 그의 영화에 대한 남다른 사랑 – 특히 깡패 류의 격투가 나오는 액션 영화 – 이 영화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 영화의 줄거리는 대충 이렇다. 공고를 다니는 두 친구가 있다. 석환(류승완)과 성빈. 석환은 당구장에서 사이가 좋지 않은 예술고 패거리와 실랑이를 벌이다 결국 싸움이 휘말린다. 극구 주먹다짐을 만류하던 성빈은 우발적으로 예고생 중 한명을 병으로 쳐 죽음에 이르게 한다. 그리고 그는 소년원가 교도소를 거치고 다시 사회로 나온다. 그러나 그를 따라다니는 과거는 결국 그를 주먹의 세계로 편입하게 만든다. 그리고 석환의 동생 상환, 그는 석환이 형사임에도 불구하고 깡패 세계를 동경하는 꼴통이다. 이런저런 경로를 통해 성빈의 밑으로 들어가게 되고 성빈은 조직의 확장을 위해 총알받이 역할을 할 돌격대에 상환을 끌어들여 결국 죽게 만든다. 그리고 석환과 성빈은 자신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었던 운명과 우정과 배신 속에서 격투를 벌이고 둘 다 파멸의 길을 간다.
‘패싸움’ ‘악몽’ ‘현대인’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이렇게 4부로 나뉘어진 시퀀스는 액션과 호러, 다큐, 갱스터의 장르를 아우른다고 한다. 실제로 1부에서는 공고생과 예고생 간의 격투가 박진감 넘치게 펼쳐진다. 그리고 2부에서는 실수로 죽인 예고생이 계속 나타나 성빈의 상처를 건드리며 괴롭힌다. 3부에서는 깡패 세계와 형사 세계의 일상과 고달픔을 인터뷰 형식으로 잘 담아내고 있으며 4부에서는 조직간의 격투나 배신, 복수 등 갱스터적인 요소를 잘 담고 있다. 저예산으로 만든 대개의 엉성한 영화와는 분명히 다르다. 그는 영화를 만들고 즐길 줄 아는 감독인 것 같다. 그러나 류승완의 이 영화에서는 그런 것들이 중요한 것 같지는 않다. 표면적인 주제는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운명에 대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류승완은 그러한 것을 원하는 것 같지가 않다. 그에게 이 영화가 중요한 것은 주류 영화가 보여주는 기교적인 액션과 다른, 진정 몸으로 하는 액션을 보여주는 것인 듯하다.

실제로 류승완은 무술이나 태권도 실력이 상당한 것 같다. 얼마전 브루노라는 이탈리아인이 배우려 애썼던 540도 회축인가 하는 기술도 가볍게 선보인다. 그와 성빈이 보이는 액션에는 어떠한 안전장치나 트릭도 없다. 쉴새없이 내뱉는 욕설과 근육질적인 남성의 날렵한 몸짓, 움직임이 주는 속도감과 쾌감, 거기에 그의 모든 관심이 집중되어있는 듯하다. 이건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다.
류승완의 실제 동생이라는 상환 역의 류승범의 연기도 대단하다. 쉴새없이 내뱉는 욕설이나 ‘깡패스러움’을 대단히 리얼하게 가식 없이 잘 표현하고 있다. 혹시 정말로 그 쪽 세계에 몸담고 있는 게 아닌가 의문이 갈 정도이다. 이 두 형제는 실로 영화의 자식이라는 생각이 든다. 재주꾼이다.

김지운 감독이 말했던 것 같다. 류승완처럼 철저한 저예산 B급 영화를 B급 영화답게 만들 줄 아는 사람이 우리 영화계에는 필요하다고. 그리고 류승완의 이 영화를 칭찬하기에 바쁜 영화계로 인해 지금의, 아니 과거의 류승완을 잃어버리는 것 같다고.(실제로 칼럼 제목도 승완아 돌아와라 였던 것 같다)

그는 B급 세계에서 기웃거리며 A급이 쌓아놓은 사상누각의 모래 기둥을 돌기둥으로 튼튼히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역할은 작으면서도 사뭇 크다.
아무튼 그는 이제서야 꿈을 이루었고 그 꿈을 풍성히 하기 위해 계속적인 기웃거림이 필요한 웅크린 개구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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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박찬욱
1963년 생
서강대 철학과 졸업
영화 <달은 해가 꾸는 꿈>(1992), <3인조>(1997)
비평집 [영화보기의 은밀한 매력](1994)

제작 : 이은, 심재명(명필름)
출연 : 이병헌, 송강호, 신하균, 이영애, 김태우

되도록이면 돈을 아낀다는 명목으로 영화는 최대한 비디오로 해결한다는 생각을 하고는 있지만 가끔 꼭 극장에서 봐야 한다고 찜해 놓은 영화가 있다. 공동경비구역 JSA(이하 JSA가 그러했다.
같이 지내는 세진이와 꼭 보자는 약속을 해 놓고는 차일피일 미루다가 드디어 오늘 보게 된 JSA.
우선 대중들이 왜그리도 입소문이 지독히도 났는지, 왜 쉬리의 초반 흥행 돌풍을 앞질렀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나는 박찬욱이란 감독의 이름이 생소하다. 그 감독의 작품을 봐두었던 게 전혀 없다.(사실 한국 영화 자체를 본 게 별로 없다) 그러므로 감독에 대한 이미지에 고착되어 색안경을 끼고 볼 필요가 없었다.(사실 요즘 나오는 영화 대부분이 그렇다)

영화는 분단의 현실 속에서 가장 첨예하게 대치하고 있는 한반도의 판문점. 그 곳에서 남과 북의 병사 사이에 싹튼 우연한 우정을 담고 있다. 그러나 표면적으로는 남한 병사와 북한 병사 사이에 벌어진 살인 사건에 대한 미스테리적 요소를 취하며 관객의 호기심을 잡는다.
포스터 문구대로(여덟발이 아니라 열한 발이었다. 왜 여덟발이라 했는지 잘 모르겠다.) 그들 사이에 열한 발의 총성 안에 담겨 있는 진실을 – 사람들의 입소문으로 대충은 알고 있었지만 –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중심축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 미스테리적 요소보다도 영화에서 진실이라 보이는, 남북 병사들의 우정, 바로 그 원인이자 과정인 부분에 더 비중을 두고 만든 영화가 아닌가 생각한다.

20자평에서 본 글처럼 냉전 이데올로기로 몰아 붙이려는 사람들에 대한 저항 같기도 한 이 영화는 우리네 사람들의 거시적인 현실을 네 명의 병사에 투영한 것처럼 보인다. 왜 우리는 서로를 기만하고 위장하며 이 대치 상황을 지키고 있는가. 무엇을 위한 일이며 누구의 잘못인가. 우리는 북한을 괴뢰 정부로, 우리를 정통성을 확보한 정부로 인식하고 어떠한 상황에도 이러한 공식을 대입하여 판단한다. 그러나 누가 알겠는가. 제3자인 스위스 중령 이영애의 눈에는 양자 모두 거짓만을 얘기할 뿐이다. 우리도 그들을 기만하고 우리 자신과 세계를 속이며 그들도 우리를 기만하고 그들 스스로를 속이며 세계와 문을 닫은 것이다.
영화 속 병사들은 대사처럼 분단의 반세기, 오욕의 세월, 그 상처를 뛰어넘어 – 한 뼘 정도 밖에 되지 않는 경계선을 넘어 – 그렇게 우정을 키우고 이데올로기의 가면을 벗었지 않던가.
어쩌면 간단한 것이다. 그들도 우리도 스스로가 쳐 놓은 울타리를 허무는 것은 말이다. 분단의 현실이란 타자에 의해서만 주어진 것도 아니요, 어쩌면 우리 스스로가 그 함정 속으로 뛰어든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 스스로가 자기 배반의 역사를 선택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 영화는 어쩌면 우리네들의 자아 동일성이라는 문제를 한편으로는 우스우면서도 조그만 자극만 줘도 터져 버려 비극이 되어 버리는 판문점의 한 이야기를 통해 제기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의 노선도 그들의 노선도 아닌 그 경계선이나 그 바깥에서.
그런 의미에서 중립국 스위스 장교이자 과거 북한군의 딸로 설정된 이영애의 위치는 이 영화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말할 수 있다. 어쩌면 군더더기 인물인 것처럼 보일 지도 모를 그 역할은 실제로는 이 영화를 어떤 이데올로기적 틀로도 해석하지 말아달라는 감독의 의도가 숨어있는 것이다. 스위스 장교 소피 중령은 양대 이데올로기 사이에서 희생된 우리 민족의 슬픈 운명을 표상하기도 한다. 북한 포로 중 포로 교환 때 그 어느 진영으로 가는 것도 거부한 그녀의 아버지는 결국 중립국에서도 받아주지 않는 세계의 고아가 되어 버린 그녀의 가족사가 그것을 말해 준다.

영화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 남한 병사와 북측 병사 사이의 그 문제의 사건이 일어나는 장면. 김광석의 ‘부치지 않은 편지’가 배경에 깔리면서 총격이 벌어진다. 남한 병사가 북측 병사를 권총으로 죽이는 장면이다. 어쩌면 우리가 역사의 죄인이라는 의미인지도 모를 그 장면은 우리 민족의 역사적 현실에 대한 처절한 상징이다. 진정으로 돌아오지 않는 편지 속 사연의 주인공들이 아직도 그러한 모습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과연 우리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며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버려야 하는지를, 지금까지 가져 온 것들을 훌훌 털어버리고 다시 바라봐야 하는 시기라는 것을 암묵적으로 말하고 있는 이 영화.

초반에 남측 병사가 투신할 때 스톱모션을 비롯해 카메라를 회전시키는 장면이나 지뢰밭을 제거할 때 스크린 양쪽에서 불꽃놀이 하듯 번쩍이던 섬광을 처리한 효과 같이 조금 영화 색깔과 어울리지 않는 과잉 기교도 보이기는 하지만 침착하게 내용을 전개시키는 힘이나 미스테리와 드라마 사이에 균형을 잃지 않고 유지하는 연출은 뛰어나다. 박찬욱 감독은 3년만의 신작에서 작품성과 흥행성 두 마리의 토끼를 잡는 저력을 보여줬다. 그의 차기작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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