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발터 벤야민의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가장 기억에 남은 문장을 다시 들춰 봤다. 아마도 새 카메라를 사고 나서 오랜만에 사진 찍는 행위로 상기되어 있는 요즘, 무의식적으로 나는 벤야민의 문장을 불러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벤야민의 그 문장은 내 기억과는 조금 달랐다.
따라서 카메라에 나타나는 것은 육안으로 보는 것과는 다른 성질의 것임이 분명하다. 다르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사람의 의식이 작용하는 공간의 자리에 무의식이 작용하는 공간이 대신 들어선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사람들의 걸음걸이가 어떻다는 데 대해서 대충은 얘기를 할 수는 있지만 정작 발걸음을 내뻗는 몇초 동안의 자세가 정확히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거의 알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또 라이터나 스푼을 잡으려고 할 때의 손동작에 대해서도 대충은 알고 있지만 손과 쇠붙이 사이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으며, 더구나 우리가 처해 있는 그때그때의 기분에 따라 그것이 어떻게 변하는가에 대해서는 거의 알고 있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여기에 카메라는 그것이 지닌 보조수단, 즉 하락과 상승, 중단과 분리, 사진진행의 확대와 축소 등으로써 개입한다. 정신분석학을 통하여 충동의 무의식적 세계를 알게 된 것처럼 우리는 카메라를 통하여 비로소 시각의 무의식적 세계를 알게 된 것이다.
나는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으로 일반화하여 표현하고 있다고 기억하고 있었지만 벤야민은 정확하게 카메라를 지칭하여 시각의 무의식을 대면할 가능성을 포착했던 것이다.
그리고 더불어 이 문장의 독일어와 영어 문장을 제미나이에게 물어봤다.
so erfährt man durch die Kamera erst vom Optisch-Unbewußten, wie durch die Psychoanalyse vom Triebhaft-Unbewußten.
It is through photography that we first discover the existence of this optical unconscious, just as we discover the instinctual unconscious through psychoanalysis
영어와 독일어 문장에서는 ‘시각의 무의식’이 아니라 ‘광학적 무의식’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나는 모두 훌륭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시각적 경험을 조건 짓는 눈의 광학적 조건을, 그 조건으로서 광학적 원리를 우리는 확장된 눈을 통해 대면한다.
스냅 사진은 길을 헤매는 것으로부터 탄생한다. 스냅 사진은 발터 벤야민이 체현한 도시 산책자의 태도를 사진의 원리 안에서 실천한다고 할 수 있다. 헤맨다는 것은 목적지로 가는 길을 잃었거나 목적지 자체를 잃어버린 상태일 것이다. 그 순간 비로소 모든 것이 예기치 않게 낯설어지고 무심코 지나쳤던 사소한 사물과 시공간이 피사체가 될 자격을 얻는다. 스냅 사진에 실패란 없다. 벗어난 초점, 잘못된 노출, 망가진 구도, 무심한 피사체도 우리의 시각적 무의식을 열어 낸다. 카메라는 언제나 우리의 시선이 누락하는 세계를 무작위적 원리로 포착하고 있다.
<종착역>은 스냅 사진에 대한 영화적 고찰에 가까운 것처럼 보인다. 네 아이가 찍은 사진이 영화 곳곳에 꾸준히 삽입되어 있다는 점에 연연한 말은 아니다. 물론 이것이 가장 직유적인 방식이기는 하다. 이 영화가 스냅 사진의 정지된 이미지에 시간을 할애하면서 우리는 운동 이미지의 영화적 세계 안에서 놓치기 쉬운 것을 경험한다. 무엇보다 우리는 인물 자체의 시선을 경험한다. 설령 그것이 일회용 카메라의 렌즈를 경유한 상상적 시선에 불과할지라도 말이다. — 이에 대해 우리는 영화에서 시선을 상상된 형태로만 경험할 수 있을 뿐이라는 말을 보태야 할 것이다 — 우리는 아이들이 찍은 스냅 사진을 통해 그들이 실제로 보았다고 믿을 법한 것을 경험한다. 이것은 영화가 일반적으로 구사하는 시점 쇼트의 방식보다 더 직접적인 시점 쇼트이다. 그럴 수 있는 이유는 영화에 삽입된 스냅 사진이 영화적으로 통제되지 않은 불균질함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사진 자체가 통제되지 않은 방식으로 찍혀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이들은 카메라를, 의탁한 시선 장치를 통제하지 못한다. 지하철 노선도는 초점이 나갔고 동네 풍경 사진의 3분의 1은 손가락이 가려 버렸다. 스냅 사진의 즉흥적인 통제 불가능성이 오히려 그 시선의 주인을 상상하게 만드는 역설적 효과가 이 영화에서는 아이들의 미숙함과 조응한다. 정지된 스냅 사진 이미지를 응시하는 동안 우리는 통제되지 않은 세부와 실패한 시선을, 그리고 그 시선의 주인을 지각한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가 인물들의 연기나 플롯의 구성을 통제하지 않는 것을 원리로 하는 것처럼 보이는 점을 이해해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이 영화에서 인물들은 연기를 하기보다 현실에서 볼 법한 일상적 행위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어떤 몸짓도 계획되지 않았고 어떤 발화도 정제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때로는 인물의 대사를 정확히 알아 듣기 어려울 때도 있다. 강세도 리듬도 없고 다듬어지지 않은 온전한 구어적 대화에 아이들의 실생활 언어까지 보태면 아무리 훌륭한 녹음 환경을 갖춰 촬영했어도 이 영화에 담긴 대화가 온전하게 내러티브를 구성하기는 힘들 것이다. 플롯도 어떤 우연적 상황을 제시하는 것에 가까운 것처럼 보인다. 소정이 핸드폰을 분실하는 바람에 아이들은 구신창역에서도 떨어진 외딴 노인정을 찾게 되고 송희가 고양이를 만나는 바람에 아이들은 집으로 돌아갈 시간을 놓쳐 버린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즉흥적이고 우연적인 가능성에 몸을 맡긴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영화적 결을 구축해 낼 수 있으리라 믿는 이들의 영화다.
이 영화는 아이들이 세상의 끝이라는 목적지를 잃고 헤매지 않았다면 만나지 못했을 순간을 다룬다. 어떤 길도 초행인 그들에게 화면 바깥에서 갑자기 끼어 든 개 짖는 소리 같이 예견치 못한 놀라움이, 아이들이 노인정 안으로 들어가고 홀로 남은 고양이가 슬며시 자리를 옮기는 바람에 카메라의 프레임이 유례 없이 이동하는 우연한 영화적 선택이 그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영화가 아이들의 손에 일회용 카메라를 쥐어 주고 그들이 이미지를 만나는 과정을 따라가고 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아이들이 자꾸만 낯선 길에 발을 들여 놓으면서 미지의 이미지가 발생하는 여정이라는 점에서 네 아이의 사진 여행은 자꾸만 산책하는 스냅 사진가의 태도를 은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헤매는 그 곳이야말로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의 끝 지점이라는 것을 이 영화에 포개어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낯선 길을 거니는 아이들이 만난 이미지가 포착한 것은 익숙한 것의 생경한 감각만은 아니다. 아이들의 사진에는 그 순간의 감정이 내재한다. 이를 전학 온 시연이가 연우, 소정, 송희와 친구가 되어 가는 과정 속에서 이해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함께 분식집을 찾고, 여름 방학 사진 숙제에 대한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지하철 1호선 종점을 가고, 함께 비를 맞고, 낯선 시골 노인정에서 같이 밤을 보내면서 네 아이가 모험심으로 친밀함을 키운 기억이 총 열 세 장의 스냅 사진 이미지 이면에 자리한다. 그러므로 스냅 사진을 전면에 두고 말하자면 이 영화를 네 아이의 사진에 담긴 맥락에 대한 해설이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이 때 나는 영화가 사진을, 사진이 영화를 보충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어진다. 사진과 영화가 각자 시선의 불가능한 지점을 보완하면서 피사체의 표면에 인물과 영화 자신의 감정과 감각을 채워 주고 있다고 말이다. 이 때 한낱 사물도 기억의 담지자가 되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 이제, 젖은 흙에 포개진 발자국이나 문앞에 널브러진 신발들이 우리에게 되돌려 주는 것을 생각해 볼 시간이다.
12월 비평의 편지 주제는 ‘집에서 본 영화, 영화관에서 본 영화’였다.(링크) 이 주제에 대해 내가 기대한 바는 사실 발터 벤야민의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다루었던, 극장에서 이루어지는 관람 행위의 사회성에 대한 논의였다. 극장에서 보는 영화만이 영화적 체험의 본령이라고 믿는 사람들의 주장에 대해 나는 언제나 벤야민의 이론을 떠올리며 의식하고 있었다. 벤야민을 사랑하지만 나는 이 이론에 대해서만큼은 반대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니면 내가 벤야민을 오해해 오고 있었거나.
오랜 시간 수많은 시네필로부터 들어 온, 암실(Darkroom) 속에서 거대한 스크린을 바라본다는 것의 고유함과 위대함을 찬양하는 태도는 라이트룸(Lightroom)의 시대에도 다른 환경에서 영화를 보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취향의 편협함에 불과하다. 그러나 벤야민이 말하는 극장이 가능케 하는 집단 관람의 사회성은 다른 문제였고, 그것을 영화의 고유한 체험이라고 한다면 그럴 수 있는 것이었다. 나는 이게 틀린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반박할 수 없었다. 그런 중 이주연의 영화음악에서 이상용이 하는 말을 들으며 영감을 받아 오래 전 트윗한 적이 있었다.(링크) 이를 다시 부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의 역사 초기에는 뤼미에르 형제의 시네마토그래프와 함께 에디슨의 키네토스코프도 있었다. 키네토스코프는 만화경과 같아서, 뷰파인더 같이 작은 창을 통해 작은 암실 통에서 영사되는 영상을 감상하는 장치다. 이것은 오직 한 사람만이 볼 수 있다. 기술복제시대의 초기는 더 많은 관람 전파를 위해 거대한 스크린과 거대한 암실이 필요했고 영화 보기의 방법으로 시네마토그래프가 승리했다. 그러나 디지털 복제가 가능한 현대에 와서는 각자의 만화경, 키네토스코프가 다시 부상하고 있다. 이것이 이상용의 이야기였다.
영화적 환상에 대한 사적 경험이 집단적으로 관계 맺으며 감상과 비평적 태도가 사회적으로 생성되는 것이 영화적 체험이라고 한다면, 암실의 거대한 스크린은 당대의 기술적 한계에서 연유하는 조건이었을 뿐, 극장 바깥 라이트룸 세계의 스크린에서도 그 체험은 가능하다.
24장의 사진이 모여 1초의 영상을 이루고 숏이라는 파편이 모여 총체적 작품이 되는 영화적 형식이 내포하고 있는 것처럼, 영화적 체험은 극장 안에서조차 사적으로 파편화되어 있다. 그것을 집단화하고 사회화하는 기능이 암실에서만 가능하다고 할 이유가 라이트룸 시대에는 없다.
벤야민이 말하고자 했던 영화적 체험, 사적으로 고유하면서도 사회적인 체험은 기술복제가 가능한 예술로서의 영화가 지닌 가능성의 본질이었다.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이지만 그 가능성은 기술복제 자체에 있다. 필름과 극장보다 복제 기능이 더 확장된 시대, 라이트룸 시대, 디지털 키네토스코프 시대라고 할 수 있을 만한 현 시대에 영화적 체험과 그 가능성을 여전히 극장과 암실에서만 모색하고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영화의 가능성을 갉아 먹고 혐오하는 태도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