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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는 10만 킬로미터의 도로가 있다고 한다. 이는 환산하면 반경 1제곱 킬로미터 내에 1 킬로미터의 도로가 있다는 얘기다. 그래서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도로 밀도가 높은 나라 중 하나란다. 그런데 한국도로공사는 2020년까지 도로를 20만 킬로미터로 늘리겠다고 한다.
한국에 있는 야생동물 중 가장 작은 활동영역을 가진 너구리조차도 1제곱 킬로미터의 영역을 움직이며 산다. 적어도 도로 하나는 생활영역 안에 들어와 있는 셈이다. 한국의 야생동물들은 절대 안전한 제 집을 가질 수 없다.
지리산 인근 88고속도로와 산업도로 등지를 중심으로 로드킬 사례를 조사 연구하는 최태영, 최천권, 최동기 세 사람은 30개월동안 5천 7백여 동물들의 사체를 발견했다. 이들의 표현에 따르면 지리산은 하나의 섬이다. 이 산 둘레를 도로가 완전히 두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지리산의 야생동물들이 지리산 안에서만 고립된 생활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각자의 생활 영역과 습성을 섬처럼 두른 도로가 강제할 수는 없다.
로드킬을 조사하는 이 세 사람은 각 동물들마다 로드킬을 주로 당하는 지역과 시간대 등에 어떤 패턴이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매일 인근 도로를 돌아 다니며 로드킬 데이터를 쌓아 간다. 그러나 결과는 모든 종들이 모든 지역에서 골고루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지도상에 로드킬 지점을 표시하는 점들은 빼곡하게 표시되어 하나의 선을 이루고 있었다. 도로는 동물들에게 전방위적 재앙이다.
세 연구원은 어느 날 88고속도로에서 조금 전 차에 치인 삵 한 마리를 발견한다. 의식은 없지만 다행히 호흡은 끊어지지 않았다. 이 삵을 데리고 와 정성스레 치료한다. 이 삵에게 연구원들은 ‘팔팔이’라는 이름을 지어 줬다. 몇 달 후 팔팔이는 예의 건강을 되찾고 다시 야생으로 돌아간다. 팔팔이에게 부착한 무선 신호 장치로 팔팔이의 생활을 추적하던 세 사람은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다. 팔팔이는 약 일주일간 고산 지대를 넘어 약 30킬로의 여정 끝에 88고속도로 인근으로 가 버린 것이다. 채 한 살도 되지 않은 어린 삵이, 그것도 사고 당시 기억할 수도 없었을 길을 찾아 고향으로 돌아간 것이다. 팔팔이는 그 여정 중 12개의 도로를 건너는 위험을 감수했다. 본능에 끌려 고향으로 돌아온 팔팔이는,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차에 치어 발견된 그 지점으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어미가 차에 치여 쓰러지자 이 곳을 떠나지 못하던 새끼들이 어미 주변에서 똑같이 차에 치여 먼지처럼 사라지는 곳. 금슬 좋은 너구리에게 의도하지 않은 이별을 강요하는 곳. 이 곳이 바로 인간이 만든 자동차 도로다.
약 3년 전. 회사에 출근하기 위해 버스를 기다리던 나는 저 편 연신내 로타리 가운데에 거무스름한 작은 무언가가 흐느적거리는 것을 보았다. 처음에는 비닐 봉지려니 생각했다. 계속 시선이 그 쪽으로 가 자세히 보니 그것은 한 마리 개였다. 도로를 횡단하던 중 차에 치인 것이 분명했다.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아 반쯤은 땅에 납작하게 붙어 있고 반쯤은 일어나려 애를 쓰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그것은 교차로 한 가운데에서였다. 자동차들이 사방에서 지나갈 때마다 나는 머리 뒤가 찌릿함을 느꼈다. 처참함을 아슬아슬하게 비껴 가고 있었지만 어느 순간에는 아스팔트 바닥에 납작하게 걸레처럼 붙어 사라질 것이 분명했다. 그 개의 무력해 보이는 몸부림이 교차로를 오고가는 자동차들을 멈추지는 못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 때의 충격이 아직도 생생하다.
나는 이 영화를 보다가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야생동물은 너무나도 무고하지만 그들의 먼지 같은 죽음은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었다. 더구나 이들은 사람처럼 절규하거나 원망하지도 않고 그들의 방식을 고수하다가 죽음을 맞이한다. 그들의 죽음은 떳떳하고 무고했다. 인간은 이러한 타자의 비극을 모른 채 하고 문명을 키우고 있으니, 문명은 그 자체가 인간의 원죄이고 도로와 자동차, 그리고 자동차 소음은 그 물질적 현현이다. 나는 우리의 원죄를 한 시간 반 동안 똑똑히 지켜봐야 했고 그 앞에서 벌어지는 동물들의 비극은 부정할 수 없는 슬픔이었다.

중간 중간 도로 위의 동물 시체 위로 도로 개발 소식과 이로 인한 경제적 효과를 전망하는 뉴스 멘트가 흘러나온다. 그런데 한국은 여전히 개발이 곧 복음인 곳이다. 이제는 인간의 자연과 생태계에 대한 정복이 불러온 응징의 상징과도 같은 광우병 소도 제 손으로 들여 오고 있고 온난화의 위협은 갈수록 음험해지고 있다. 개발과 성장을 위해 희생되는 인간들에게조차 관심이 없는 이 땅에 한낱 야생동물들의 쉴새 없는 떼죽음을 심각하게 자책하는 것이 과연 어느 정도의 가치가 있을까?
그러나 생각보다 길거리에 내던져진 동물들의 시체가 알리고 있는 것은 동물 애호가의 측은지심 이상이다. 보기 싫어도 볼 수밖에 없는 개발 문명의 살해현장, 공모하고 묵인하고 있는 것의 증거 제시로서 이들의 시체는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상징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야생동물들의 죽음으로부터 가난한 인간의 고난은 멀리 있지 않은 것 같다. 그리고 인간이 특정 지역, 특정 시대에 집중적으로 자원을 퍼다 쓰면서 감당해야 하는 희생의 크기에서 동물들의 죽음이 차지하는 양은, 남한에서만 전국 도로에서 1년에 3만여 마리 그 이상이다. 모든 곳에서 인간의 죄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 보기 싫어도 보이고 하기 싫어도 행하고 있다는 것을 이 영화는 보여준다. 그래서 도로 한 가운데 바짝 엎드려 야생동물들의 소리 없는 죽음을 지켜보는 시선은 오히려 위대하다.

‘주노’를 봤다.
씨네21에서 아주 좋게들 말하고 있는 그 ‘주노’ 말이다.
평범한 10대 미혼모가 출산을 선택함으로써 맞닥뜨리게 되는 현실 가족제도(성인과 미성년이라는 구분을 포함해서)의 한계와 문제, 새엄마나 입양 예정 부부 등을 통해 묘사되는 소박한 문제의식과 대안적 자세, 취향을 나누는 사랑스러운 소통의 형태 등등…
애정을 갖게 하는 인물들과 이야기임에는 분명하다.
하지만 이 영화는 인물들이 마주하는 문제에 나를 깊이 인도하지는 않는다.
10대가 임신을 해서 아기를 낳겠다고 한 것만으로도 이야기의 추동력이 강해서인지 영화는 다른 ‘사건’을 만들 엄두를 내지 못한 것 같다.
아기가 만들어졌다는 이야기의 시작 이후 입양자에게 전해지는 마지막까지 사건은 더 커지지 못하고 평행선으로 진행된다.
어쩌면 최초의 충격이 갈수록 약해진다고 말해도 될 것 같다.
각 인물들이 10대의 임신이라는 주어진 운명에 부딪치면서 문제를 증폭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운명의 충격을 각자의 방식으로 줄여 가는 방향으로 진행된다고 말하는 것이 적절할까?
(그렇다고 씨네21의 기사에서 언급된 것처럼 마크와 주노가 덜컥 제대로 엮여 버리는 것 같은 사건을 기대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건 문제를 증폭시키는 게 아니라 애초의 문제를 잊어버리는 것이다.)
아무튼 그래서 이 영화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문제를 곱씹는 즐거움이 아니라 문제 안에서 그래도 잃지 않는 인물들의 건강함을 지켜보는 즐거움이다.
물론 모든 영화들이 문제의 심연으로 관객을 이끌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사랑스럽게 가만히 지켜볼 수 있게 해 주는 그 만큼으로 충분히 제 몫의 가치를 얻을 수 있다.
그래도 이런 영화들은 각자의 영화 목록 안에 애정어린 소품, 그 이상의 자리에 가 있을 법하지는 않다는 게 내 생각이다.
각자에게는 각자의 정당한 자리가 있고 그 온당한 자리를 찾고 발굴하는 것이 비평 저널의 한 역할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자신이 지지하는 취향에 대해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최근 씨네21의 이 영화에 대한 반응은 좀 과한 것 같다.
(최근에는 ‘원스’나 ‘카모메 식당’ 같은 영화들이 그랬던 것 같다.)
한국영화에 대해서도 씨네21이 제 몫 이상의 평가를 전략적으로 해 줬다고 생각하는데 이와 비슷하게 ‘건강하고 착하지만 작은’ 영화에 대해 그러는 것 같다.
소박하고 정치적으로 올바른 선택을 따르는 것 같은 이 작은 영화들이 비판받을 이유는 전혀 없지만 최근 씨네21은 이런 소품 취향에 대한 애정을 다소 과도하게 드러내면서, 하지만 이를 미학적으로 입증하지는 못하면서 지면을 소비하고 있는 것 같다.
작은 영화를 지지하는 극장들이 죽어 가니, 어쩌면 씨네21은 산업에 대항하는 ‘예술의 정치화’ 방식으로 이 영화들을 대하는 것 같다.
이해는 가지만 이런 경향이 과연 작은 영화들의 (미학적) 제 자리를 찾아주는 데에도 도움이 될지는 의문이다.

원스는 참 예쁜 영화다. 너무 예뻐서 욕할 수도 없고 칭찬할 수도 없다. 그런 영화가 있다. 정치적으로 또는 미학적으로 더할 나위 없이 바람직해서 오히려 할 말이 없는. 그러니까 어떤 식으로든 말하고 싶은 것이 생기는 영화는 사실 전혀 바람직하지 않거나(그런데도 바람직한 것처럼 허세 부리거나) 바람직함을 넘어서 그것의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는 영화다.(사실 후자의 경우는 무언가 북받쳐 오르는데 감당해 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정당한 비판보다 정당한 칭찬이 더 어려운 법이다.)

나는 이 영화를 아주 흐뭇하게 봤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보기에 조금의 모자람도 없는 영화였다고 생각하지만 하고 싶은 말은 이 영화가 뮤직비디오의 가장 솔직한 형태가 아닐까 하는 것 정도였다. 그러면서 생각은 다른 곳으로 가지를 치더라.

이미지만으로 구성된 내러티브는 분석적이다. 숏과 숏 사이의 틈을 메워야 하기 떄문이다. 이 틈을 메우는 것은 우리를 추동하는 서사의 욕망 때문이겠지만 말이다. 카메라가 주관적 시선의 자리에 있을 때조차 우리는 이 시선을 서사의 욕망 안에서 보고자 한다. (예를 들어 카메라가 어두운 구석에서 저쪽에 있는 한 사람을 지켜보는 숏이 있다고 치자. 이 다음에 또는 이 전에 그 구석에 있는 시선이 누구의 것인지를 말해 주는 숏이 통상적으로 있어야 한다. 그것이 없거나 무언가 뒤바껴 있다면, 그 시선은 지젝식으로 말하면 ‘히치콕적’일 것이다.) 그러니까 카메라의 시선은 완전히 관객 자신의 시선이 될 수는 없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관객에게 카메라의 시선은 서사의 인증 하에서 승인되는 타자의 시선이다. 관객에게 카메라의 시선은 어떤 객관성을 담보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다시말해 관객과 카메라는 느슨하게 붙어있다. 그런데 음악은 카메라의 객관성을 무장해제시킬 수 있는 것 같다. 어떤 사랑 노래가 깔린다면 이 노래를 부르는 연인을 객관적으로 잡은 숏이 있다 해도 이 숏은 지극히 주관적인 시선으로 가득차 있다.
뮤직비디오를 보면 음악은 이미지를 주도한다. 음악이 이미지를 자신의 서사 안으로 잡아당긴다. 예를 들어 요즘 유행하는 UCC 뮤직비디오의 조잡한 그림들은 노래 가사를 문자적으로 재현한다.(‘Tell Me’라는 가사를 ‘태음인’ 또는 ‘태릉인’이라는 글자로 표시하는 것은 UCC 뮤직비디오의 일반적인 방식이다.) 한국에서 유행하는, 노래와는 상관없는 스토리를 가진 영상의 뮤직비디오라 해도 음악의 정서와 서사를 (가사와는 상관 없더라도) 시각적으로 설명해 준다.(개인적으로 이런 방식은 매우 싫어한다. 내게는 조성모의 To Heaven 뮤직비디오가 그 첫 기억인데, 이런 뮤직비디오에서 음악의 서사와 이미지의 서사는 서로 매우 신경질적으로 달라붙는 것 같다. 마치 더이상 새로운 서사를 제시하지 못하는 음악이 이미지를 먹어치워 스스로 폭발지경에 이른 것 같은 느낌이다. 음악이 갑자기 멈추고 영상만이 흐르는 따분한 순간은 이미지가 얼마나 신경질적으로 음악에 복종하고 있는지 말해주는 것만 같다.) 음악과 이미지가 동시에 진행되고 있어도 이미지는 음악의 실현에 불과하다는 것. 말씀이 먼저 있고 나서 세계가 만들어졌다는 신화와 같다. 그렇다면 소리는 시각의 객관성 위에 존재하는 초월적인 힘과 같은 것이 아닐까?

가지를 너무 오래 쳤는데, 영화 원스는 음악이 서사를 구축한다. 원스 OST에 수록된 곡은 총 약 43분여다. 한 곡이 여러 번 반복돼서 나온 것을 감안하면 이 영화의 전체 러닝 타임 86분 중에 음악은 반 이상을 흘렀다. 남자의 옛사랑에 대한 추억과 상처, 여자의 남편에 대한 사랑과 원망스러움은 노래를 통해서만 전달된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 호감을 느끼는 것도 노래를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다. 음반을 내고 가수가 되려는 꿈 역시 마찬가지다.(물론 음악은 아주 멋지고 적절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는 호응을 얻을 수밖에 없다.) 이미지와 대사는 음악 사이의 인서트이거나 음악의 실현이다.(악기 가게에서 남과 여가 노래하고 연주하면 가게 주인은 웃음을 짓는다, 녹음실에서 프로듀서는 처음에는 무시하며 건들거리다가 음악을 듣고는 그들을 존중하고 녹음작업에 심혈을 기울인다 등등.) 그러나 그들이 현실원칙으로 돌아오는 것은 음악을 빌릴 수가 없다.(함께 하자는 남자의 제안에 여자가 거절할 때 음악은 흐르지 않는다.) 그렇다면 환상과 현실의 교환관계에서 이 영화는 기존의 뮤지컬 영화와 오히려 비슷하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이것은 ‘어둠 속의 댄서’와 비교해서 생각해 봐야 할 문제인지도 모른다. ‘어둠 속의 댄서’는 정반대의 경우, 즉 비참한 현실의 고통과 충격을 어떻게든 환상으로 치환해야만 버틸 수 있을 때 음악이 쓰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