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빛 속으로 포스터
이 영화는 환상과 현실을 넘나든다. 그런데 환상과 현실을 가르는 것은 사람이다.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있어서는 안되는 사람이 자리함으로써 환상이 성립된다. 달리 말하면 이 영화에서 어떤 인물은 시간과 공간을 은유한다. (나는 최근–에서야- 베리만의 ‘산딸기’에서 이와 동일한 방식으로 환상에 진입하는 것을 봤다) 그리고 그 인물은 삐삐소녀다.

수영에게 모든 것은 1979년 6월 대학교, 삐삐소녀에게서 시작됐다. 그녀는 자신보다 두 살 많은 76학번이었지만 첫 여인이었고 관념적인 독일 시에서 눈물을 찾아내 보여주는 영감이었다(그리고 삐삐소녀는 성악과 학생이다). 수영이 그녀를 알게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확성기와 전단지를 들고 학교 건물 위로 올라갔고, 거기서 뛰어내렸다.

영화는 삐삐소녀를 추모하기 위해 수영에게 나비의 꿈을 꾸게 한다. 기다리던 영어 수학 과외, 수지라는 이름의 여고생과 그 오빠 수영을 만나고 오빠 수영을 통해 삐삐소녀를 다시 만난다. 수지는 어느새 대학생 수영을 좋아하고 수지 오빠 수영과 삐삐소녀는 꼭 달라붙어 있다. 그런데 삐삐소녀는 첫사랑이 고교 시절 자신에게 영어 수학 과외를 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수영은 삐삐소녀의 첫사랑을 재현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첫 문장은 수정해야겠다. 수영은 삐삐소녀를 추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삐삐소녀와 다시한번 대면하기 위해 나비의 꿈을 꾼 것이다. 어쨌든 꿈은 대학생 수영 자신의 죽음을 확인하는 순간 끝난다. 삐삐소녀는 이미 죽었고 돌이킬 수 없다. 그런데 현실은 여전히 삐삐소녀의 현존으로 어른거린다. (대학생 수영의 꿈 속) 그녀의 첫사랑 수영은 서울에서 벌어진 군사작전의 무고한 민간 희생자가 됐고 그 여동생 수지는 삐삐소녀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운명으로서 대학생 수영에게 남은 것이다. 그리고 이제 수영은 수지를 자신과 삐삐소녀 사이 운명의 일부로 받아들임으로써 풀리지 않던 시를 쓰게 됐다.

나는 이것이 수영이, 감독이 지금 80년대를 견뎌내는 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이 감성적인 삐삐소녀가 79년 투신자살을 한 것은 (수영에게) 치명적인 80년대의 징후다. 그렇다면 삐삐소녀의 감수성은 상실한 70년대의 유산이라고 봐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여전히 남는다. 하지만 나는 이것이 수영에게 잃어버린 70년대의 그 무엇이라기보다 어떤 시원적 형태, 갖기도 전에 상실한 것으로 남는다고 본다. 수영은 2학년인 1979년, 70년대를 인지하기도 전에 80년대의 징후를 먼저 목도했다. 모든 것은 삐삐소녀에서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수영은 삐삐소녀를 추억하기보다 환상으로 그녀를 현존시킨다. 이것이 바로 현대에도 80년대를 살아남게 하는 수영의 유일한 방법이다. 그리고 그녀를 연장하고 (수영에게 수지는 삐삐소녀의 운명적인 연장이다. 수지 오빠 수영이 실제 삐삐소녀의 첫사랑이 아니라도 상관없다. 그에게는 지금 그 적당한 자리가 필요하다.) 시를 쓰는 것은 80년대의 유령을 계속 노래 부르고 달래기 위함이다. 그렇지 않다면 수영은 삐삐소녀 이후에야 비로소 시를 쓰기 시작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굳이 수업 없는 일요일에 있어서는 안될 학생들 앞에서 그 기억을 말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무서운 이야기를 싫어하는 우리에게 그럼에도 끄집어 내야 하는 이야기가, 항상 우리 곁에 있어야 하는 이야기가 있다고 말하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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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워라 – 현경과 영애

영화 내내 이신애는 자신의 불가해하기까지 한 고통에 대한 신의 보이지 않는 응답을 바라는 듯했다.
이신애는 제도적 교회가 용인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사이 경계를 잔혹하게 오고갔다.
전도연은 정말 경계 끝까지 가려는 것 같았다.
가슴이 턱 막혀 쥐어짜는 울음소리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그녀는 어린 양과 목자, 그리고 악마의 모습을 동시에 보여준다.
물론 이 중에서도 갈대밭 가운데 유부남 아래 누워서 하늘을 향해 ‘잘 지켜보고 있어?’라고 나즈막히 읆조리는, 상하가 뒤집혀 기괴하기까지 한 악마같은 얼굴을 눈여겨봐야 한다.
이 독을 품은 사악한 질문은 고통받는 인간이 구원이라는 동일한 질문에 대해 얻은 다른 한 측면의 대답 같은 것이다.
그리고 끝내 이신애는 구원받지 못했다.
비밀스런 햇볕은 이신애의 실질적 고통을 해결해 주지 못했다.
그 햇볕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단지 텅 비어있는 응시, 2시간 20분 동안 완전히 지쳐버린 이신애가 앞마당에서 머리카락을 자르는 동안 뒷켠 아무것도 아닌 곳에서조차 미동도 않고 있는 바로 그 말없는 응답뿐이다.
‘잘 지켜보고 있어?’라고 다시한번 묻는 것일 수도 있고 ‘여전히 너는 말이 없구나’라고 확인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신애는 거울을 들고 앞마당으로 나와 자신의 머리카락을 자르려 하는데 쫓아온 노총각 김사장은 그 거울을 들고 이신애를 비춰주며 원치 않는 친절함을 보이고, 이신애는 말없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자른다.
그리고 카메라는 컷을 하지 않고 뒷켠으로 물러나 말없는 햇볕만 비춘다.
이 시선의 이동을 컷으로 나누는 것을 생각하기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신애가 머리 자르는 숏과 아무것도 아닌 햇볕 숏을 커팅해 병치해 버리면 이신애의 지금까지의 고통은 갑자기 의미없는 햇볕의 완전한 객관적 응시로 대체돼 버린다.
반대로 커팅을 하지 않고 두 숏을 한 숏으로 만들면 햇볕의 응시가 이신애의 주관적 고통의 세계로 빨려들어간다.
그래서 주체가 일종의 신과 같은 대타자에게 던지는 원망과 질문 같은 것을 이 마지막 숏에서 떠올릴 수 있는 것이다.

세상의 진보를 얘기하기에는 지쳐버린 시대에 불안은 진보의 불가능이 아니라 번식의 불능으로 옮아간 것인가. 번식 불능의 시대는 역사의 종착지로 모자람이 없어 보인다. 출산/육아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간주하는 자본주의는 사회적 출산에서 자유로운 성관계를 종용한다. 자의에서 시작한 불임 장애. 그래서 인간이라는 종이 더이상 번식하지 않는 것을 이 역사의 마지막으로 가정하는 상상은 충분히 개연성 있다.
나는 이 가정으로도 충분히 디스토피아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 생각이 짧았다. 바로 지금 우리는 충분히 디스토피아적인 시대를 살고 있다. 우리 바로 뒤에는 전쟁, 테러, 폭력, 배타와 차별, 격리, 환경오염과 쉼없는 파괴가 있다. 2027년의 미래는 바로 지금이다. 바로 지금, 세련된 도심 뒤에는 황무지와 폐촌을 볼 수 있고, 영화 속 영국 불법이민자 난민촌에서 벌어지는 시가전과 같은 장면을 볼 수 있으며 죽은 남편을 안고 통곡하는 아랍의 여인을 볼 수 있다. 게다가 난민 수용소는 아우슈비츠를 재현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어떤 동일한 형태로 절망적이다. 이것이 이 영화의 중요한 시대정신이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영국일까? 하필이면 미국이 아니라 영국일까? 과거의 영국, 지금의 미국, 그리고 다시 미래의 영국. 시대를 뒤집어 시대의 원류와 원죄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까?
덧붙여 이 영화가 원하는 희망의 대안은 무엇일까? 백인-앵글로색슨-청교도-남성이 아니라 흑인-오리엔탈(아랍-동양)-불교-여성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일까, 아니면 예수가 아니라 마리아라고 말하고 싶은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