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일하다 말고 느닷없이 영화 ‘몽상가들’이 생각났다.
느닷없는 이유는 이 영화를 봤을 때 말 그대로 아무런 생각도 느낌도 없었고 급격히 잊혀진 후로 내 머리를 뚫고 나온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오늘 정말 아무런 개연성 없이 머리 속을 뚫고 나온 ‘몽상가들’은 68 혁명이 얼마나 철없는 아이들의 장난과도 같은 소동이었던가를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 생각은 정말 간단한 키워드를 통해 스쳐지나가는 도식적인 연상작용에 불과하다.

– 이 영화는 한 남매가 그들의 부모가 휴가로 집을 비운 사이 벌이는 소동이다.
– 이 남매는 남몰래 서로에게 근친상간적 애정을 느끼고 있다.
– 남매는 헐리웃 영화에 대한 자아도취적인 시네필인데, 동경해 마지않는 헐리웃의 고향에서 온 꽃미남이 등장하자 그를 쟁취하려는 욕망에 사로잡혀 애정에 균열이 생긴다. 근친상간과 동성애가 혼재한다.
– 남매의 갈등은 여자가 미국인과 성교하면서 마무리된다. 이 미숙아 남매는 부모가 부재한 상황에서 미국인 꽃미남을 통해 이성애, 이종교배의 질서를 회복한다.
– 그들은 헐리웃 영화에 대한 시네필적 열정으로 결속돼 있고, 이 미시적 세계 안으로 침잠하면서 거시적 세계의 변화에 대해 무감하다.
– 그들의 한바탕 소동이 마무리될 무렵 부모는 휴가에서 돌아온다. 그리고 이즈음 발생한 프랑스의 68 혁명은 그들에게 미시적세계에서의 근친상간적, 동성애적 욕망의 좌절을 보상받기 위한 한풀이의 장이며, 동시에 그들이 그 상처를 안고 기존의 질서로안전하게 복귀하기 위한 장이다.
– 결국 68 혁명은 미숙아가 뒤늦게 ‘철이 들게 하는’ 길이었고 세계는 바뀌지 않았다…?

폴란스키 감독은 왜 이토록 68년을 비웃고 있는가…라고 생각할 즈음 옆에서 베르톨루치 감독 작품이라고 귀띔해 준다.
그렇다. 느닷없이 튀어나온 연상작용이었던 것이다. 개연성 없이.
어쨌든 문득 나는 68년이 혁명에의 희망과 좌절을 동시에 안겨줬고 이후 많은 이들은 혁명이라는 단어와 이 말이 지니는 상상력을 잃었으며, 68년은 시대를 단절시킨 것이 아니라 가속화한 시점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음? 내가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지…?



차치하고 생각해 보면 이런 도식은 누구든 끼워 맞출 수 있을 것 같은 공상이다.
그리고 평소 68 혁명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본 바도 없다.
그런데도 나는 이런 퍼즐 끼워 맞추기를 왜 즐기는지 알 수 없다.

어떤 영화는 그 영화에 대해 글을 쓴다는 것은 참 무의미하다고 느낄 때가 있다.
그건 내가 그 영화에 합당한 글을 써 낼 그릇 만큼의 세계를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그래서 나는 부족한 영화에 대해 어줍짢은 말을 늘어놓는 데 더 익숙한 것이다).
‘하나 그리고 둘’이 그런 영화가 아닐까.
나는 이 영화를 너무 늦게 봐 버렸다.
그것도 TV를 통해 우연히 말이다.
보고 나서 드는 생각…영화가 인간에게 해 줄 수 있는 종교적 위안과 성찰을 이 영화가 제시하고 있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영화는 양양이 말하듯 ‘남이 모르는 일을 알려주고 못 보는 것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하고, 이 영화가 그런 일을 수행하고 있지 않은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나도 그들의 뒷통수를 찍어주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소설을 영화화하는 것은 무엇을 포기하고 무엇을 선택하는가 하는 문제가 항상 따라 다닌다.
물론 소설과 영화의 러닝타임이 다르기 때문이다.

론 하워드 감독은 소설 다빈치 코드에서 미스테리적 서사라는 폭주기관차를 선택하고 기호학적 상상과 추리를 포기했다.
또한 폭주기관차의 긴박한 움직임 속은 각 인물들의 진면목을 지워 버렸다.
소니에르와의 신뢰를 지키기 위해 랭던과 소피를 곤경에 빠뜨렸던 우직한 신사 베르네는 단순하고 무지한 조연이 되었고, 자신을 유령에서 천사로 거듭나게 해 준 아링가로사 주교와 그의 주를 위해 손에 피를 묻히는 비운의 알비노 사일래스는 광기 어린 악한의 충복에 가깝게 그려진다 – 사일래스의 과거에 대한 설명 신은 이 중요한 인물을 진정성 있게 묘사하기에는 부족했다.
티빙은 성배에 대한 순수한 학문적 열정을 가진 익살 넘치는 영국 노신사의 디테일을 잃어버렸다.
성배를 중심으로 자신의 믿음을 지키려는 이들과 은폐된 진실을 밝히려는 이들이 공히 절박한 자신의 신념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은 이로써 평면적인 선악 구도로 바뀌어 버린 것이나 다름없다.

게다가 우리는 자크 소니에르와 소피 느뵈의 애틋한 관계를 잃었을 뿐만 아니라 소니에르의 풍부한 상징적 수수께끼의 세계를 잃었다.
이는 무엇보다 안타까운 일이다.
소설은 소니에르의 수수께끼를 빌어 성배라는 정체 불명의 환상에 기댄 중세 유럽의 여신에 대한 다양한 은유를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 나는 여신의 세계를 재조명하는 것이 이 소설의 미덕이며 부정확한 설을 차용하고 있는 것이 이 소설의 악덕이라 생각한다.
영화는 소니에르의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랭던과 소피가 2천년의 역사를 넘나드는 심리적 시간을 1분도 채 안되는 물리적 시간으로 대체해 버렸다 – 론 하워드는 서사의 흐름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때문에 영화는 여느 종교적 음모론의 흥미 외에는 다른 매력을 잃어버렸다.

영화에서 소피 느뵈는 많은 시온 수도회 멤버들의 호위 속에서 소설보다 더 화려한 여신이 되었지만, 풍부한 상징의 언어들이 생략되어 속 빈 강정이 되어 버렸다 – 또한 소피는 소니에르의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데 기여한 바가 없는 나약한 여성으로만 묘사된다. 어릴 때부터 소니에르로부터 여신의 상징과 그 비밀을 풀어가는 훈련을 받았던 소피의 ‘성배를 찾을 가치가 있는 존재’로서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다. 소피는 폐쇄된 공간에서 초조해 하고 있는 랭던의 얼굴을 감싸면서 심리적 안정을 줬을 뿐이다.

나는 내심 소설의 서사를 포기하고 중세 유럽의 어둠 속에 있던 다양한 여신의 흔적들과 성경에 실리지 못한 다른 복음들의 숨겨진 이야기를 구원해 내는 영화를 기대했다.
물론 론 하워드에게서는 아니었다.
헐리웃은 정말 대중들이 이 소설에 대해 음모론에만 탐닉하고 있다고 믿는 것일까?
나는 이 영화를 개막작으로 선택한 칸 영화제가 적잖이 당황하고 있지 않을까 상상하고 있다.

p.s. 소설의 저자 댄 브라운은 여기 등장하는 비밀결사를 포함한 다양한 요소들이 역사적 사실에 근거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관련 다큐멘터리를 참고할 때 성배 자체도 중세 어느 작가에 의해 처음 등장했을 뿐만 아니라 시온 수도회라는 단체도 허구이다. 시온 수도회의 역대 그랜드 마스터 명단을 포함한 이 내용은 1950년경 프랑스의 플랑타르라는 자에 의해 날조된 것임이 드러났다(관련 다큐멘터리는 미국 히스토리 채널에서 제작했으며 ebs에서 방영했다). 소설은 소설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