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시감은 내가 벗어날 수 없는 속박과도 같은 굴레를 암시한다.
시간 속에서 내가 세계를 인지하는 방식의 미묘한 교차점, 회기점.
결국은 다시 돌아와야 하는 시원이자 종말에 대한 환상을 보는 것이다.
그런데 한바퀴 돌아와서 마주하는 것은 운명과 우연이 동일해지는 환상, 그동안 지각해 왔던 사물의 차이가 무화되는 환상, 충만한 의미가 무화되는 환상, 이 공포스러운 암시는 아닐까.
헤매다 보니 돌아왔고, 이 무의미한 정박지에서 무심코 다시 출발해야 하는 속박을 암시하는 것은 아닐까…

영화 ‘시간’을 보다 마지막 순간 스치는 생각…
(그러나 ‘시간’은 기시감을 보여주지 않는다. 말 그대로 완벽한 ‘반복’을 보여준다. 이 반복은 이 영화가 그리는 운명이 영화 내적 환상의 결과물이 아니라 명백한 운명 자체라는 것을 반복적으로 말하고 있다.)

오늘 일하다 말고 느닷없이 영화 ‘몽상가들’이 생각났다.
느닷없는 이유는 이 영화를 봤을 때 말 그대로 아무런 생각도 느낌도 없었고 급격히 잊혀진 후로 내 머리를 뚫고 나온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오늘 정말 아무런 개연성 없이 머리 속을 뚫고 나온 ‘몽상가들’은 68 혁명이 얼마나 철없는 아이들의 장난과도 같은 소동이었던가를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 생각은 정말 간단한 키워드를 통해 스쳐지나가는 도식적인 연상작용에 불과하다.

– 이 영화는 한 남매가 그들의 부모가 휴가로 집을 비운 사이 벌이는 소동이다.
– 이 남매는 남몰래 서로에게 근친상간적 애정을 느끼고 있다.
– 남매는 헐리웃 영화에 대한 자아도취적인 시네필인데, 동경해 마지않는 헐리웃의 고향에서 온 꽃미남이 등장하자 그를 쟁취하려는 욕망에 사로잡혀 애정에 균열이 생긴다. 근친상간과 동성애가 혼재한다.
– 남매의 갈등은 여자가 미국인과 성교하면서 마무리된다. 이 미숙아 남매는 부모가 부재한 상황에서 미국인 꽃미남을 통해 이성애, 이종교배의 질서를 회복한다.
– 그들은 헐리웃 영화에 대한 시네필적 열정으로 결속돼 있고, 이 미시적 세계 안으로 침잠하면서 거시적 세계의 변화에 대해 무감하다.
– 그들의 한바탕 소동이 마무리될 무렵 부모는 휴가에서 돌아온다. 그리고 이즈음 발생한 프랑스의 68 혁명은 그들에게 미시적세계에서의 근친상간적, 동성애적 욕망의 좌절을 보상받기 위한 한풀이의 장이며, 동시에 그들이 그 상처를 안고 기존의 질서로안전하게 복귀하기 위한 장이다.
– 결국 68 혁명은 미숙아가 뒤늦게 ‘철이 들게 하는’ 길이었고 세계는 바뀌지 않았다…?

폴란스키 감독은 왜 이토록 68년을 비웃고 있는가…라고 생각할 즈음 옆에서 베르톨루치 감독 작품이라고 귀띔해 준다.
그렇다. 느닷없이 튀어나온 연상작용이었던 것이다. 개연성 없이.
어쨌든 문득 나는 68년이 혁명에의 희망과 좌절을 동시에 안겨줬고 이후 많은 이들은 혁명이라는 단어와 이 말이 지니는 상상력을 잃었으며, 68년은 시대를 단절시킨 것이 아니라 가속화한 시점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음? 내가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지…?



차치하고 생각해 보면 이런 도식은 누구든 끼워 맞출 수 있을 것 같은 공상이다.
그리고 평소 68 혁명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본 바도 없다.
그런데도 나는 이런 퍼즐 끼워 맞추기를 왜 즐기는지 알 수 없다.

어떤 영화는 그 영화에 대해 글을 쓴다는 것은 참 무의미하다고 느낄 때가 있다.
그건 내가 그 영화에 합당한 글을 써 낼 그릇 만큼의 세계를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그래서 나는 부족한 영화에 대해 어줍짢은 말을 늘어놓는 데 더 익숙한 것이다).
‘하나 그리고 둘’이 그런 영화가 아닐까.
나는 이 영화를 너무 늦게 봐 버렸다.
그것도 TV를 통해 우연히 말이다.
보고 나서 드는 생각…영화가 인간에게 해 줄 수 있는 종교적 위안과 성찰을 이 영화가 제시하고 있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영화는 양양이 말하듯 ‘남이 모르는 일을 알려주고 못 보는 것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하고, 이 영화가 그런 일을 수행하고 있지 않은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나도 그들의 뒷통수를 찍어주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