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정재은
출연 : 배두나, 이요원, 옥지영, 이은실, 이은주

혜주, 지영, 태희, 온조, 비류
이 다섯 인물들은 여상을 갓 졸업한 고양이들. 이 영화를 보기 전에 이미 이 영화를 이해하기 위한 코드들인 고양이의 속성에 대해 들어버린 탓인지 그녀들은 고양이로 보였다.
애완용 고양이도 완전히 야생의 습성을 버리지 못할 만큼 고양이는 무엇엔가(‘인간에게’라는 말이 더 적절할 듯 하다) 길들여지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할 만하다. 그러나 고양이가 길들여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말이 자신을 길들이는 그 무언가와 자신의 관계가 실질적으로나 명목적으로나 단절되어 있다는 말로 풀이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길들여진 것을 익숙해진 것, 세상에 맞설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고 나 자신을 내가 길들였다고 믿을 수도 있다. 그것이 실질과 어긋난 것이라 하여도, 착각에 머무른 생각이라 하여도 그 착각 안에서만큼은 고양이와 주인의 관계가 묘하게 동떨어져 있으면서도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어쨌든 길들여진다는 단어는 불편함과 답답함을 상기시킨다.
이 불편하고 답답한 현실 속에서 막 훈련 과정에 입소한 고양이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주인과 충돌한다. 혜주는 주인의 착한 애완 고양이가 되거나 주인과 싸워 승리자가 되려고 하지만 결국은 주인에게 동화되되 결코 주인이 되지 못하고 따돌림당한다. 지영은 주인을 잃은 상처를 안고 자신이 자신의 주인이 되려 하지만 주인의 가혹한 지침과 통제 앞에서, 가뜩이나 손에 쥐고 있는 도구도 없는 상태에서 역부족임에 고통스러워 한다. 태희는 이들 사이를 착한 시선으로 오가면서 고양이에 관심을 가지고, 동시에 자신도 고양이임을 자각한다. 비류, 온조 자매는…직계 주인이 없는 고양이이되 완전한 야생 고양이는 아닌(그들은 화교 출신이다), 하지만 서로가 있어 서로에게 길들여질 수 있기 때문에 주인이자 종일 수 있는 인물들이 아닌가 한다.

삭막한 길 모퉁이에 버려져(또는 그냥 그렇게) 있다가 지영에게 건져올려진 새끼 고양이 티티는 다섯 고양이의 품을 거쳐 가면서 그들의 야생성을 불러일으킨다. 자신만만하던 혜주가 지치고 더해가는 불행 속에서 지영이 침묵하고 자신이 지닌 관심과 애정에 비할 데 없을 만큼 무관심한 가족으로부터 태희가 탈출한다.(비류, 온조 자매는 이 이야기에서는 빠진다. 그들은 이 이야기의 윤곽보다 조금은 넓은 곳에 위치하는 것 같다)

그래서 태희는 평소 돈이 없어 실행 불가능하지만 항상 외국으로 떠나길 바라던 지영과 함께 주인의 영향권에서 벗어나는 것은 자신이 자신을 길들이는 고양이가 되고 싶음을 알리는 고백이다. 하지만 이 탈출은 해방이 아니다. 고양이는 타자에게 길들여지고 싶지 않다 하더라도 자신의 손으로 자신을 길들여야만 한다. 게다가 이 탈출 게임의 룰은 여전히 주인의 손 안에 있다. 탈출해도 다른 주인이 기다리고 있다. 더 끔찍한 것은 그들이 아무리 그렇게 발버둥 치더라도 주인은 필요할 때만 그들을 불러 만지작거리고는 보내버릴 뿐 그다지 그들에게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혜주는 괴로워하면서도 주인 품에 남아 있고 태희와 지영은 주인의 품을 떠나 자신이 주인되는 길을 찾으려 하며 비류, 온조는 지영과 태희의 손을 거친 새끼 고양이 티티를 데리고 여전히 관심권 밖의 공간에서 멤돌 것이다. 남아 있거나 떠나거나, 주변에서 멤도는 이 고양이들은 주인과 정면 대결을 하지 못했다.
나도 떠나 버리고 싶다. 하지만 떠나도 주인은 여전히 존재하고, 그럼으로써 나는 패배를 우회해서 인정하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주저한다. 그렇다고 내가 태희와 지영을 비판할 수는 없다. 나는 어쩌면 그들보다 더 주인을 두려워하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감독 : 김기덕
출연 : 조재현, 서원

이제서야 알았다. 그의 영화들은 유사한 테마들의 변주곡이었다는 것을. 새장 여인숙을 한기(조재현)과 선화(서원) 사랑이 영그는 곳으로 잡은 것, 창녀와 그의 포주 내지 깡패가 등장한다는 것,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사랑한다는 말이 폭력으로만 표출되는 운명적 상황이 담긴 이미지들.
한기는 영화 내내 거의 말을 하지 않는다. 아니, 사실은 성대를 잃었는지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인물. 그는 항상 그러하듯 사회의 서출. 어느 한 여대생에게 품은 욕망 또는 사랑의 감정을 창녀로 만들어 자기 주변에 두는 것으로 표현하는 쓰레기 인간.
한 인간의 진심이 다른 사람에게 완벽하게 전달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가 하는 것과 인간이 얼마나 폭력적인 욕망의 응집체인가 하는 것을 항상 그러하듯 극단적으로 표현하는 김기덕.
대학생이라는 것이 지니는 사회적 고상함의 표상을 무참히 짖이기고 안정의 테두리를 무너뜨려 혼돈의 삶으로 몰아넣음으로써 상하의 위계질서를 부정하는 김기덕의 파괴적 힘.

그러나 나는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망가뜨린 한기의 진심을 알고 그를 따라 몸을 팔며 떠도는 선화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다.
김기덕의 진심은 알겠으나 그의 극단적 비유는 폭력적 상황을 정당화하기 쉬운 위험도 안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이것도 하나의 아이러니일까.
나와 이 영화 사이에 벌어지는 이 충돌은 한기와 선화의 관계와 닮아 있지 않은가.
욕망과 폭력이라는 바다 위에 떠 있는 배들이 조우하면 정말 한 배가 가라앉아야만 하는 것일까.

追記 : 김기덕의 극단성은 미학적 영역에서 현실을 드러내 주는 데 기능한다. 투박하고 급진적이어서 이중 부정의 강한 긍정으로 오독될 수 있는 것도 여기에 기인하지만, 말 그대로 그것은 강한 부정에 기반하여 영화라는 가상의 현실적 존재성을 확보하는 방편이다. 다시말해 김기덕의 영화는 극단성을 외피로 우리 앞에 비로소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한기는 타고난 부정성의 아들이다. 그에게는 사회의 부정성이 각인되어 있고 부정을 긍정으로 기입한 선화에게 그의 것이 전화됨으로써 그의 어둠 속에 감추어진 진심이 드러난다.
여기서 우리가 품는 단순한 질문은 왜 극단적인 폭력적 촉각이 스크린에 새겨져 있는가보다는 왜 한기가 자신의 사랑을 그런 방식으로밖에 표현하지 못하는가이어야 한다. 유운성씨의 표현대로 이 영화의 가상은 폭력적인 현실의 모방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 둘러쳐진 절규의 향취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자화상을 확연히 감지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그 저주같은 운명에 대해 체념하기보다는 슬픔을 안고 저항을 꿈꾸어야 할 것이다. 그 때만이 내가 안은 부정성과 영화의 부정성 사이에서 비로소 온전히 소통했다 할 것이므로.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에게 우간다 구호재단인 UWESO로부터 한 장의 팩스가 날라온다. 한동안의 시민전쟁으로 남편과 젊은 남성 부양자들을 잃고 적게는 대여섯명에서 많게는 스물 남짓의 자식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 여성들, 에이즈에 감염돼 열명 넘짓의 가족이 모두 죽는 등의 자국 현실을 영화로 찍어 세계에 알려달라는 요청이 담겨 있었다. 이에 키아로스타미는 비행기를 타고 우간다로 가 2000년 4월부터 1년동안 머물면서 한편의 다큐멘터리를 찍게 된다.

이 영화는 지금의 우간다를 이루는 두 면들을 보여준다. 근대화의 여파와 전통문화의 잔재, 카톨릭 신앙과 세속적 인간, 영어와 토속어, 비참과 행복 등으로 구성되는 우간다의 두 얼굴이 균형있게 다루어지면서 그들의 존재성을 일갈한다. 키아로스타미는 단지 구호 차원의 동정심 유발만을 기대했을지도 모를 구호재단의 의도보다 한발 더 나아가 현대인의 근원적인 문제에 대한 고뇌라는 보편성까지 성취해낸 것 같다.
어느 기사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키아로스타미의 카메라에는 우간다의 그늘만이 아니라 이방인과 문명의 이기를 마냥 신기해하고 그 앞에서 즐거워하는 어린이들의 웃음과 순박함까지 담겨 있다. 이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데 우간다의 그들은 극빈과 질병 속에서 저주에 휩싸인 존재들, 그래서 우리가 보살피고 구조해야 할 연약한 존재라는 식의 일방적 우월감을 일찌감치 배제해 내려는 키아로스타미의 의도가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키아로스타미는 어린 아이들의 –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 매우 중대한 고민과 사건들을 너무도 충실하게 담아내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은, 진실된 의미에서의 이방인이자 관조자였으며 지금도 그러하다. 이는 그가 존재를 어떤 값싼 몰입 없이 자신의 체험 속에 참여시켜 내려는 시도를 계속하고 있다는 의미이며 이 점에서 우간다의 그들에게 절망과 파멸의 무거운 짐만 채색해 버리는 우를 1년동안이나 경계하면서 그들을 지켜보았다는 말이 된다.
그래서 나에게 첫 번째로 각인되는 중요한 몇몇 장면들은 키아로스타미가 방문한 에이즈 환자 센터와 한 촌락에서 벌어지는 집단 가무들이다. 치유 불가능한 현대 최악의 병을 간직한 어린 남녀 학생들, 한 방에서 수십 명의 자녀들과 생활해야 하는 어머니 또는 할머니의 쉽게 감내하기 힘든 고통들은 그들의 흥겨울 수밖에 없는 – 집단적 가무는 어떠하든 흥을 돋운다 –  노래와 율동들 뒤에 말없이 오버랩된다. 우리는 암묵적인 비극을 감지하면서도 이 낯선 이방인을 환영하는 듯한 그들의 행위들과 그들 속에 파묻혀 같이 손뼉을 치는 감독의 몸짓 속에서 알 수 없는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밖에 없다. 침울한 표정으로 이 이방인을 경계해야 할 터라고 우리는 생각하기 쉬운데 그들은 오히려 노래를 부르고 행복하다 하며 웃음을 지어 보이지 않는가. 그들은 구조해야 할 가련한 존재가 아니라 마땅히 존중받아야 할 존재임을 분명히 한다.
그러나 웃지 못할 아이러니가 있다. 그들에게 번진 에이즈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원인이 있으니 그것이 서구 제국주의의 첫 번째 얼굴이었던 가톨릭의 교리 때문이다. 콘돔을 쓰는 것은 자연과 신의 섭리를 어기는 것이라 하여 엄격히 금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민속 음악으로 유대하고 고통을 승화하며 이방인을 반기는 것과 이렇게 대비된다. 이것 뿐만 아니다. 시민전쟁 또한 자세히는 모르나 서구 국가들의 이해 관계 안에서 조장된 비극이 아닌가. 그들은 그렇게 얼룩진 자신들의 삶을 어떻게든 보듬으려 애쓴다.

영화 도중 키아로스타미는 화면을 약 5분 남짓 꺼 버린다. 우리에게 암흑으로 가득찬 세상에서 살만하냐고, 영화 볼 만하냐고 짐짓 묻는다. 그러고는 사람의 가장 큰 장점은 강한 적응력, 전기 없이도 사람은 살 수 있다고 말한다. 한참 동안의 암흑으로 가득찬 스크린은 어느새 번개의 번쩍임으로 뒤바뀌면서 시각을 자극하여 그 진공상태와 채워짐 안에서 근대화가 야기한 인간의 물질화 – 물질의 제약을 극복하려던 인간이 외려 물질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게 된 상황 – 에 대해 성찰할 수 있는 기회도 놓치지 않는다. 이 장면을 통해 영화는 현대적 문제성의 근원을 우간다의 참상과 포개어 놓는 것이다. 따라서 이 영화는 위에서 말한 우간다의 두 얼굴들 속에서 자연히 우리의 얼굴을 바라보게 하는 힘을 획득한다.

다큐멘터리가 극적인 성격을 지니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해인 것 같다. 오히려 다큐멘터리는 자신의 형식이 지니는 사실성에 의해 강화된 극적 페이소스를 창출해 낼 수 있다. 위의 장면들만으로도 충분히 증명해 낼 수 있는 문제다. 하지만 호주의 부부가 입양해 가는 한 아이의 천진난만한 눈빛과 1년간의 촬영을 마치고 이란으로 돌아가는 이들의 눈에 비치는 구름 속 아이들의 모습은 더욱더 강력한 페이소스를 이끌어낸다. 엔딩으로 장식되는 구름과 아이들의 오버랩은 나에게 오랫동안 기억될 장면이기도 한데, 아이들의 얼굴은 구름만큼 선명해지지는 않고 어렴풋이 나타났다 사라지곤 한다. 현재 바라보고 있는 시각의 강렬함을 뒤흔들 정도로 선명한 정신의 잔상들이 피어오르는 것을 표현한다면 딱 그 장면만큼일 것 같다. 그리고 1년간의 체험과 기억이 강렬하게 나타난다는 것은 우간다에서 이방인일 수밖에 없었던 이란의 한 감독이 그들과 함께 한 시대를 살고 있다는 존재론적인 연결의 끈을 몸으로 각인함을 뜻한다. 정신과 몸이 중첩되는 이미지는 그렇게 달성되는 것이며 존재들의 상호 연쇄, ‘아멜리에’가 말하고 ‘레드’가 말하기도 한 숭고한 성찰이 키아로스타미로부터 나에게 전이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