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Krzysztof Kieslowski

출연 : Zbigniew Zamachowski, Julie Delpy

영화음악 : Zbigniew Preisner

굳이 이 영화를 ‘평등’이라는 의미에 천착해서 보지 않더라도, 해석은 매우 용이하다. ‘블루’나 ‘레드’와는 달리 이 영화는 장르적 틀 안에서 전개되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그나마 번역이 수월했던 영화.

평등 : 폴란드인 카롤이 프랑스인 도미니끄와 결혼하고 프랑스에 거주하며 결혼생활을 하는 동안 그는 일종의 성불능 상태에 놓인다. 이는 계속 지켜보면 심리적 억압이나 위축에서 기인한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성적 쾌락을 충족시켜주지 못했다는 이유로 프랑스인 도미니끄가 이혼을 하려 하는 데에는 볼품없고 기백없고 발기도 잘 되지 않는 왜소한 카롤에 대한 못마땅함이 개입되어 있는 것이다. 카롤은 도미니끄로부터 버림받은 후 비참한 모습으로 프랑스 거리를 떠돈다. 그는 처절하게 폴란드로 돌아가 독하게 돈을 모으고는 위장 장례식을 치르고 유산을 도미니끄에게 넘겨준다. 그러나 그것은 예전의 멸시에 대한 복수였다. 자신이 처했던 위축된 상황, 왜소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고스란히 도미니끄에게 경험시키기 위한 계략이었다. 카롤의 살해 혐의로 옥살이를 하는 도미니끄는 그제서야 깨닫는다. 동등한 위치에 서서 서로를 존중하는 것만이 사랑이라는 것을. 진정한 평등 하에서의 관계란 어떠한 심리적 위축감도 개입될 수 없는 것이라는 점을. 카롤은, 경제적으로 부유해진 카롤은 도미니끄 앞에서 위축될 것이 없었다. 그때서야 비로소 그는 도미니끄에게 오르가즘을 선사해 줄 수 있었다.

병을 넣으려는 노파 : 자기 키보다 조금더 높은 위치의 구멍으로 병을 넣으려 애쓰는 한 노파는 ‘블루’, ‘레드’에도 나온다. 항상 이 노파는 주인공에 의해 관찰되고, 정확한 기억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노파를 지켜보던 주인공은 웃음을 잠시 머금으며 관조하다가(동시에 자신에 대한 관조? 자기의식과 동시에 운명에 대한 선택의 순간?) 문득 작은 결심을 하게 된다. 이렇게 같은 장면으로 비슷한 심상과 전환 효과를 내면서 이 노파는 세 영화를 이어준다.

비둘기 날개 소리 :

하나 — 이 영화에서는 줄곧 비둘기는 보이지 않더라도 비둘기 날개 소리가 주인공 주변을 맴돈다. 나의 작위적 해석을 듬뿍 가미한다면, 이 음향 장치는 주인공의 감정이나 사고의 전환과 처한 입장의 변화 등이 일어날 때 그것을 감각적으로 체크할 수 있도록 설정된 것 같다. ‘블루’에서는 잠시간의 암전이 일종의 소격 효과를 일으키며 관객의 몰입을 저지하고 생각을 정리할 여지를 부여한다. 이 음향 장치는 관객이 내러티브의 전개에 대한 이해를 돕는 장치이자 앞으로 일어날 인물의 변화 양상에 대한 예측을 유도하여, 감상의 용이함을 도우면서도 동시에 관객의 능동적 감상을 안내하는 것, 다시 말해 감상의 용이함과 불편함을 동시에 유발하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말고)
둘 — 엇갈렸던 두 인물의 위상이 일치되는 지점? 카롤에게는 위축되었던 심리가 극복되는 순간, 도미니끄에게는 카롤의 위에서 그와 동일선, 또는 그 아래로의 위치 변화…평등이라는 관계가 성립되는 찰나의 순간? 평등이란 한 번 성립됨으로써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각자의 위상의 변화 사이에 잠시잠시 이루어지는 순간적 상황?
셋 — 아니, 첫장면에서 카롤은 법정에 들어서는 순간 비둘기의 똥 세례를 받는다. 평등의 상태가 무너지는 상황을 뜻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위의 허접 해석과 정반대로 비둘기는 평등의 균열상태를 뜻하는 것인가?(한 번 보고는 절대 섣부른 판단 불가)

프라이즈너의 음악은 여기서도 빛을 발한다! 프랑스에서의 클래시컬하면서도 현대적 느낌의 음악, 폴란드에서의 민요풍 흥겨운 음악…그러나 정성일 씨에 의하면 음악이 흐르는 순간 그 장면은 이미지의 진실을 회의케 하는 픽션적 성격이 덧입혀진다고 한다…(이해하기 힘듬)

타인을 존중하지 않고서 자신이 존중받기를 원할 수는 없다. 상호간의 존중이란 동등한 위치에서만 가능하다…

순애보

감독 : 이재용
출연 : 이정재, 다치바나 미사토
(영화음악 : 조성우)

무더운 여름이라는 시간에 서울과 일본이라는 두 공간에서 우인과 아야가 살고 있다. 그 둘은 서로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 같지만 동시에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과연 어떤 관계일까? 이 물음을 애써 처음부터 지고 감상이라는 달음질을 시작할 필요는 없다. 지루하고 답답하거나 그 어느 것 하나 애정을 둘 만한 곳이 없는 그들의 여름날의 장면들을 차근차근 묘사하는 대로 따라가 주기만 하면 된다.

우인은 부모의 살림이 그런대로 넉넉해서 떡하니 자기 집이 하나 있지만 그런 안정감 속에서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남자다. 무감각이라는 그의 병은 왼쪽 새끼손가락의 신경이 마비돼 있다는 설정에서 공식적으로 표명된다. 그는 즐거움도 슬픔도 느낄 수가 없다. 삶에 대한 사랑을 잃어버린 것이다. 자신을 사랑하는 법도 타인을 사랑하는 법도 놓쳐 버렸거나, 아니면 일부러 놓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의 일상은 찌는 듯한 더위 아래 눌려 탈진해 버린, 수분이 다 빠져 축 늘어진 고목과도 흡사하다. 한편 무기력한 그는 타인과 대화하는 법을 모른다. 아니, 이또한 스스로 의사소통이라는 선물을 던져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아내를 잃어버린 매형이 혼자만의 집 안에 들어오는 것도 탐탁치 않아 하며 심지어 중국 화교들의 모임에서는 한국 땅에서 중국 말밖에 할 줄 모르는 이방인들에게 노골적인 주정을 하며 대화를 거부한다.
그러나 대화의 통로를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다. 현실에서 대화하는 통로를 버린 대신 판타지의 영역에서 그 통로를 찾으려 한다. 그는 미아를 훔쳐보며 애를 태우면서도 정작 그녀 앞에서는 떳떳치 못하고 실제 섹스에서는 발기도 되지 않으면서도 그 결핍된 욕구를 인터넷 포르노 사이트를 통해 위무하려 한다. 이렇게 현실에서의 결핍을 판타지에서 충족시키려 하기 때문에 판타지의 통로는 일방적이다. 이는 우인의 소심함을 드러내 주는 것이지만 확대해석하면 인간성이 현실 속에서는 박탈된 듯한 느낌을 주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그리고 이를 더 확대해석하면 현대인의 표상으로서 받아들일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그의 애처롭고도 답답한 일상은 일종의 자기연민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한편, 아야는 죽고 싶어 한다. 그것은 특별한 이유가 없는 듯 하나, 사거리 한 가운데서 각기 다른 방향으로 흩어지는 아야 가족의 아침은 피상적으로나마 그 이유를 시사한다. 아야 또한 대화가 끊겨 버린 가족 안에서 답답함을 느끼는 듯하며 그녀의 유일한 안식처였던 할머니마저 부재한 상황에서 더 이상 그녀는 삶에 대해 애정을 가질 이유가 없어졌는지도 모른다. – 그러나 이에 대해 나는 뚜렷한 물증을 확보하기가 힘들다. 사거리에서의 흩어짐이나 할머니에 대한 사랑과 상실은 그 상태를 제시해 주는 표식일 수는 있으나 자살 충동에 대한 서사적인 이해를 위해서는 역부족이다. – 어쨌든 그녀는 죽은 할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의지로 숨을 참아 죽을 수 있기를, 특히 자신이 태어난 날, 아니 그것이 자신의 생일인지 그 전날인지 구분하기 힘들 날짜 변경선이라는 공간 – 시간의 영역을 혼란케 하는 공간 – 에서 죽을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알레스카행 비행기를 타고 날짜변경선을 지날 때 숨을 참고 죽기로 계획하고 경비 마련을 위해 일자리를 찾던 중 우연히 인터넷 포르노 사이트를 운영하는 작은 회사를 찾는다.
이전의 일자리에서 알게 된 리에라는 여자는 아야에게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인물이다. 그녀는 아야에게서 사라진 삶에 대한 희망이 남아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아야에 삶의 전환점을 제공해 줄 수도 있었지만 애써 그 연결점은 생략되고 죽음행 비행기에 그녀를 태워 버린다.

이 두 인물은 엇비슷한 모습으로 우리를 비춘다. 다른 두 공간에서 살고 있지만 그들의 삶은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인간의 결핍적인 모습을 공유한다. 타자와의 고리에서 떨어져 나와 원자화되고 심지어 고립되어 버린 삶, 나 자신에 대한 애착마저 사라져 버린 건조한 자아. 그러한 이유로 이 두 인물을 인터넷이라는 매체를 통해 하나의 인연으로 엮을 명목은 어느 정도 마련된다.

명목은 만들어졌다. 그 명목을 발판으로 그들을 엮어가는 이야기를 풀어놓을 차례가 된 것이다. 그러나 그 둘을 엮어가는 과정은 찾아보기 힘들다. 우인은 단지 미아와 닮은 그녀를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관음적으로 훔쳐보았을 뿐이고 아야는 98년 수학여행 때 경복궁에서 우인과 같이 사진 찍었던, 인연도 아닌 우연만이 있을 뿐인데 우연히 같은 비행기를 타고 어디선가 본 듯한 서로를 본 순간의 그 ‘필’로 그 둘은 비약적으로 엮여 버린다. 그 필이라는 것이 실제에서도 간혹 일어나기는 하지만 영화에서 그것을 필로서 인정할 수 있도록 풀어내려면 사전 준비가 탄탄했어야 할 터인데 말이다. ‘이렇게 우리들의 이야기는 시작됐다’라는 마지막 내레이션이 소통과 애정, 상실된 자아의 회복을 표방하는 것이라면 그 자기 극복을 가능케 하는 동기가 충분히 개진되어야 하는데도 말이다.

무언가 미심쩍은 부분이 있지만 이 두 인물의 개별적인 모습을 그려내는 데에는 일단 성공을 했던 이 영화는 – 적어도 나는 그들 일상의인 단면들을 가지고서도 충분히 그들에게 동화될 수 있었다 – 마지막 결정타에서 진을 다 빼 버린다. 무더운 여름의 시간에 지쳐 버린 것일까.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향해 떠 버린 이 영화는 본 지 약 30분이 지난 지금에 허탈함을 안겨 준다.
그러나 이 영화가 품고 있는 톤은 강하게 각인된다. 우인과 아야를 장식하기만 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데에는 결과적으로 소홀했던 장면들이라 할지라도, 징후로서 기능하는 선에서는 훌륭했던 장면들 – 예컨대 우인의 마비된 손가락을 비추는 몇몇 장면이나 텅 빈 수영장을 부유하는 아야의 장면, 모니터 속의 아야를 바라보는 우인과 촬영 세트에 갖혀 있다 창 밖으로 뛰어 내리는 아야의 꿈 같은 것들 – 과 대사들, 그리고 조성우의 음악은 잡히지는 않지만 어른거리는 이미지들을 만들어 놓는다. 그것들을 통해 나는 최근에 본 멜로영화, ‘나는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보다는 이 영화를 한 수 위로 두게 된다.

2001 : 스페이스 오디세이(1998)

감독 : 스텐리 큐브릭

1. 문명의 여명

황량한 지구에 유인원이 있다. 아직 네 발로 걸어다니는 것이 어색할 정도인, 털복숭이의 유인원. 그들은 식량을 구하기 위해, 안전한 잠자리를 찾기 위해 원초적인 투쟁을 해야 한다. 그런 그들에게 하나의 ‘행운’이 찾아 온다. 어느날 아침, 잠을 설치며 나와 보니 이상한 광석 하나가 그들의 영토 가운데에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그 광석의 이름을 모노리스라 하자. 그 모노리스는 이상한 음파를 보내고, 유인원들은 모노리스 주변을 둘러싸고 소리를 지른다.

그런 일이 있은 후 그들에게 하나의 작지만 거대한 변화가 나타났다. 죽은 동물의 뼈를 만지작거리던 유인원은 유심히 뼈 하나를 바라보더니 이내 그 뼈를 손으로 ‘잡았다.’ 그리고는 동물의 유해를 그 뼈로 ‘내리쳤다.’ 일종의 희열에 가득찬 표정으로 그 파괴의 작업을 계속한다. 그러면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웅장하게 흐른다.

다시 말해 그들은 비로소 Homo Faber가 된 것이다. 무언가를 잡고 그것을 도구 삼아 자신의 목적에 맞는 행위를 하는 데에 ‘이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도구는 그들이 ‘정복’을 ‘생각’하게도 해 주었다. 부족 대 부족의 싸움에서 도구를 사용할 수 있는 부족이 승리를 할 수 있게 되고, 이것은 사고하는 능력과 정복하려는 본능의 상관관계에 대한 은유로 보인다.

전쟁에서의 승리. 그 승리감에 도취된 유인원이 하늘을 향해 전쟁 도구가 된 뼈를 공중을 향해 힘차게 던진다. 축복과 환희의 음악,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2. 미래의 예언

그렇게 시작한 인간의 도구는, 허공으로 치솟은 뼈는 단 한 컷의 전환과 함께 당시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정교하고 위대한 도구, 우주선이 된다. 이렇게 인간의 역사는 처음에서 현재까지를 뛰어넘는다.

그리고는 조심스레 큐브릭은 예언을 한다. 유인 탐사 우주선에 의한 타행성의 정복이라는 거대한 테마부터 우주인용 음식까지. 그가 묘사하는 우주 공간과 인간의 모험의 과정, 그리고 세세한 복장과 장치들까지 68년(인간이 달에 발을 딛는 것은 69년)에 완성된 영화이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으리만치 예언적이다. 그는 인간의 사유능력이 지금까지의 극한을 넘어설 단계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우주선 안에서 조깅을 하거나(이 장면을 찍은 카메라의 위치는 섬뜩하다) 무중력 상태의 표현, 그리고 그 무중력 상태에서 중력 상태와 같이 걸을 수 있도록 고안된 스튜어디스의 신발, 화상 전화 등…그의 상상력은 우리의 현재를 앞질러 간다.

플로이드 박사는(플로이드는 프로이드의 이름을 빌린 것이 아닐까. 정신분석의 아버지이자 인간 사유와 심리의, 다시 말해 의식과 무의식의 체계를 설파하면서 외부 세계가 아닌 인간 내부의 본질을 문제삼았던.) 목성에서 일어난 기이한 일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물론 우주선을 타고…그 우주선은 정거장도 있으며 자유롭게 대화할 수 있는 까페 같은 곳도 있는 품격있는 공간이다.) 그 기이한 일이란 바로 방사능을 내뿜는 지역에 있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광석, 모노리스의 출현이었다. 그는 그렇게 모노리스의 탐구를 위해, 인간 문명의 시원을 탐구하기 위해 목성으로 향한다. ‘푸른 다뉴브 강’이라는 유유한 음악과 함께 무한한 공간, 우주를 유영하면서.

3. 도구의 결정

플로이드 박사 역시 모노리스의 정체를 밝혀내지 못하고 모노리스 내부에서 뿜어져 나오는 고음파에 질식하고 쓰러진다. 그리고 지구에서 세 명의 탐사 요원과 두 명의 우주선 관리 요원, 그리고 인공지능 컴퓨터 HAL 9000(내가 알기로는 이 HAL의 바로 다음 알파벳을 따서 훗날에 IBM사가 만들어졌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이 승선한 ‘디스커버리’ 호(이 역시 훗날 NASA가 쏘아 올린 우주 탐사선의 이름이 된다)가 목성으로 향한다.

그런데 HAL(이하 할)은 하나의 의문을 던진다. 이 디스커버리 호는 무슨 목적으로 목성으로 향하는가. 세 명의 탐사요원은 왜 동면에 들면서까지 에너지를 비축해 두려 하는가. 철저한 보안 프로그램에 의해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차단되어 있었고 관리 요원마저 이제 답하지 않자, 할은 의도된 오류를 일으키면서 반항한다. 그러면서 할은 사유하는 주체로서 ‘홀로 일어선다.’ 한편 관리 요원인 보우먼과 풀은 할의 무오류성에 대한 확신이 무너지면서 할을 정지시키기로 결정한다. 밀폐된 공간에서 나눈 이 대화의 내용조차 할은 그 입술 모양으로 간파한다. 그리고 ‘살기 위해’ 할은 동면한 탐사요원과 풀을 ‘정복’ 내지는 ‘처단’한다. 홀로 살아남은 보우먼은 다시금 ‘살기 위해’ 인간이 만들어낸 ‘도구’와 투쟁하게 된다. 결국 인간에게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할은 인간의 손에 서서히 죽어 간다. 그러나 죽는 그 순간까지도 할은 담담하고 냉정한 어조를 지킨다. 절대 감정적으로 격앙되는 일이 없다. 심지어는 마지막 순간에도 탄생하는 순간 창조주에게 배웠던 ‘데이지’라는 노래를 무덤덤히 부르기까지 한다. 영국의 신사 같음. 인간보다 더 이성적인. 불완전한 인간의 대변자로서의 완벽한 이성적 존재.

여기서 도구를 가진 인간, Homo Faber로서의 인간의 본질이 드러난다. 도구는 인간이 ‘생존'(사실 이것은 절박함의 의미이기보다는 단지 인간 자신의 편리함을 위함의 의미가 강하다)을 위한 것이지만 동시에 ‘정복'(이것 때문에 생존은 절박한 문제가 된다)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도구는 영광이며 축복이자 동시에 일종의 저주와도 같은 것이다.

4. 신은 죽었다

홀로 남은 보우먼은 디스커버리호를 타고 목성에 도착한다. 목성 언저리에서 보우먼은 자신을 바라보는 듯 허공에 떠 있는 모노리스를 발견한다. 모노리스는 보우먼에게 무한의 우주 여행을 선사한다. 차원을 알 수 없는 섬광의 줄기를 거쳐 우주 태초의 빅뱅의 순간을 보여주고 마치 세포분열처럼, 양수 속의 태아처럼, 오로라처럼, 물 속에 떨어뜨린 잉크의 퍼짐처럼 서서히 무가 유의 공간화를 이루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리고 다시 지구로 돌아온다. 지구에서 늙은 자신의 모습을 본다. 서서히 숨을 거두어 가는 자신의 모습을 본다. 그 후 모노리스와 함께 태반 속의 태아가 되어 새로운 생명으로 돌아간다.

이 알 수 없는 이미지들을 본 내 두 눈은 그것들의 의미에 대해 질문한다. 한참 후 나는 이런 식으로 이 이미지들을 나의 개념 속으로 정리한다. 큐브릭은 이렇게 이 영화를 구상한 것이었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영화 도입부에 웅장하게 울리던 이 음악에 이미 포석은 깔려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신은 죽었다. 도구라는 절대적 신은 죽음을 선언해야 한다.’

이 영화에서 모노리스에 의해 부여받았다고 짐작되는 도구를 사용하는 능력은 인간에게 있어 번식과 중흥을 위한 축복이었다. 도구를 쥐고 가지고 놀 줄 아는 능력은 인간이 다른 것들을 정복할 수 있게 하고 먹고 입고 자면서 생존하는 데 있어 편리를 제공했다. 어디까지나 인간의 입장, 나의 입장에서 보면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타자를 정복하고 죽이는 행위를 수반한다. 유인원의 전쟁이 그러했고 할과 인간의 싸움, 도구와 주인의 싸움이 그러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도구의 사용은 축복인 동시에 일종의 대가를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이는 인간이 정복하기 위해 만든 도구(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는 도구 중 최상급이라 볼 수 있는, 완벽한 이성적 사유를 대신해 줄 수 있는 도구, 할)가 오히려 인간을 정복하는 재앙일지도 모른다. 이것은 ‘푸른 다뉴브 강’이 유유히 흐르며 우주를 한가로이 유영하는 뒤에 도사린 위기의 암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울리는 장엄함의 순간(유인원의 획기적 발전의 순간) 뒤에 숨어있는 음습한 어둠의 반어적 암시로 극대화된다.

그런 것일까. 결국 우리는 스스로 무덤을 파는 지난한 여정을 온 것일까. 우리는 정복해 오면서 동시에 오히려 정복당해 왔던 것일까. 이제 우리는 죽음의 문턱에 와 있는 것일까.

큐브릭은 이 순간, 죽음의 순간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선언한다. 타자를 죽이면서 살아왔던 인간에게 거대한 새로운 탄생의 순간을 예시한다. 죽음의 순간에 시원으로의 돌아감. 다시 인간의 본질 그 자체로.

139분 동안 거의 대사 없이 장엄한 이미지와 음악, 음향으로 가득한 이 영화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 지루하지 않다. 그것이 던져주는 의미에 대해, 그넘들을 가지고 놀면서 내 머릿속에 앉혀야 하는데 지루할 여가가 어디 있겠는가. 우리는 장난감을 가지고 놀 듯 세계를 내 머릿속이라는 놀이터에 데리고 와 이리저리 주므르면서 포섭시켜 버리는 능력이 있지 않은가…

P.S : 68년에 故큐브릭 감독은 이렇게 선언했다. 물론 수많은 철학자들이 68년 훨씬 이전부터 이와 같은 선언을 했다. 그 수많은 이들이 철학적 고민 끝에 내린 선언과 달리 우리는 아직도 이 죽음의 문턱에서 뛰어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직 우리는 정복하면서 정복당하는 아이러니를 반복하면서 그 신화를 맹신하고 있지는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