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주인공 가축몰이 인형 우디는 더 이상 소리를 내지 못하는 펭귄 인형 위지가 주인 앤디의 엄마 손에 이끌려 팔려 나가는 것을 저지하려다 알이라는 인형 가게 주인의 손에 ‘납치’된다. 알은 한때 인기가 있었던 인형 TV 프로의 주인공인 우디와 제시, 불즈아이, 그리고 프로스펙터를 모아서 도쿄의 박물관에 팔아 큰돈을 손에 넣으려는 야심찬 계획을 세우고 있다. 한편 납치된 우디를 구하기 위해 정의의 용사 버즈(Buzz Lightyear)를 비롯한 친구들은 위험한 구출작전을 감행하게 된다. 여기서 이 영화의 판타스틱한 모험은 시작된다.

이 영화는 정말 신난다. 장난감의 세계라는 판타지가 있으며 각 장난감마다의 독특한 기능과 개성이 하나의 인격체로서의 캐릭터를 구축하여 나름의 재미를 선사하고, 그 섬세한 그래픽과 효과가 있어 흥미진진하다. 포테이토가 구출작전에 동참할 때 아내 포테이토가 각 표정의 눈알 하며 갖가지 악세사리를 챙겨 넣어주는 것이나 버즈가 장난감 가게에서 만난 벨트 찬 버즈가 아직도 현실을 깨닫지 못하고 레이저 광선을 쏘아대는 것이나 Z대왕의 등장으로 빚어지는 스타워즈의 패러디는 그야말로 웃음을 참을 수 없을 지경이다. 그 중에서 눈에 띄는 것은 우디의 영화롭던 과거를 회상시키는 그의 동료 제시와 애마 불즈아이, 그리고 프로스펙터이다. 우디 본래의 모습(부여받은 기능)을 환기시키면서 신나게 가축몰이하던 그 생기발랄함을 발산하는 제시는 더더욱 눈부신 캐릭터이다. 이들이 어우러져서 만들어내는 판타지의 세계는 인간 밖의 또다른 세계에 대해 별다른 거부감 없이 쉽게 몰입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렇게 마냥 유쾌하지만은 않다. 문득 보다보면 소리를 내지 못해 책장 뒤에 박혀 버려진 위지의 모습이나, 옛 주인에게 버림받아 알의 손에까지 오게 된 제시의 모습은 존재 기능을 하지 못하는 장난감의 실존적인 물음을 제기하면서 처연한 감정을 일으킨다. ‘나를 아끼고 사랑하는 주인이 나를 버린다면, 부쩍 자라서 더 이상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나는 무슨 존재 의미를 지닌단 말인가.’ 이 영화를 내내 관통하는 이 물음은 앤디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존재 의미를 획득한 장난감들의 아이덴티티에 대해 계속 고민하게 만든다. 알이 큰 돈 한번 건지기 위해 우디를 앤디 엄마 몰래 슬쩍 가지고 가는 장면에서는 더더욱 처연한 생각마저 든다. 우리가 쉽게 물건으로 인지하고 부수고 가지고 놀고 버리고 바꾸고 하는 그 수많은 사물들이 나름의 영혼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가 이렇게 쉽게 교환가치화해 버리는 횡포(?)는 과연 어떻게 면죄부를 받을 것인가 하는 것 말이다. 이는 더 나아가 우리 주위 사람들과 소외받는 그 무엇들에게까지 가 닿는다. 내가 저 사람을 돈으로 볼 때, 하나의 수단으로 보고 있을 때 그는 얼마나 심각한 고통을 겪을지…이 영화는 작은 동화 속에서 그런 슬픈 감정을 이끌고 존재의 도구화를 발랄한 웃음 뒤로 경고하는 것 같다.

그런데 꼭 그런 것 같지도 않다. 이 장난감들은 시종일관 자신은 사람에게 사랑을 받을 때에서만 행복을 느끼고 존재의 의미를 찾는다. 더 이상의 획기적인 자기 존재 인식에 대한 전환이 없다. 제시와 프로스펙터는 이미 주인이 언젠가는 자신을 버릴 것이라는 것과 사랑으로부터 소외받는 것들에 대한 자각이 있다. 그러나 결국 이 판타지는 앤디의 세계 속으로 울타리지워져 버리고 만다. 그들은 적어도 ‘지금’ 주인이 자신을 사랑하고 즐겁게 가지고 노는 것에서만이라도 기꺼이 행복해한다. 우디의 구출작전이 성공하고 제시와 불즈아이까지 새 식구로 맞이한 앤디의 장난감들은 이렇게 스스로가 앤디의 도구가 되는 것을 기꺼워하면서 오손도손 살아간다. 좀 과격하게 말해서 착취당하고 사는 것이 그렇게도 행복함을 그렇게 해피엔드로 포장하여 살포하고 마는 것인가.

여기까지 가면 이 영화를 보고 그리 유쾌해지지 않는다. 은연 중에 내가 이 판타지 속의 장난감이 되어 있노라면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앤디라는 주인의 놀이개가 되어 행복해하는 꼴이 되어 버린다.
하지만 걱정 마시라. 적당히 즐기려면 그 이전의 단계에서 멈추면 되니까. 한발 물러서서 그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무관심으로 관조하는 데서도 충분히 즐거움을 얻을 테니까. 내가 장난감이 되지 않고 앤디가 된다면 이들이 행하는 구출 작전은 충분히 즐거우니까. 그들의 살아있음을 즐겁게 지켜보면서 인간보다 더한 인간적인 감정이 세세하게 표출되는 것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우니까. 버즈와 Z대왕의 비밀을 폭로하는 스타워즈의 패러디처럼 마냥 여기에는 번뜩이는 재치의 유희가 있으니까.

이 유쾌함 속에서도 한켠으로는 ‘내가 장난감이라면’이라는 생각은 생각보다 무거운 질문을 던진다. 아, 제시여, 그대는 왜 앤디의 마을을 고마워하는가. 유쾌한 제시…차라리 모든 이들로부터 사랑을 영원히 받으려는 탐욕스러운 프로스펙터가 될 지언정…

감독 : 까트린느 브레이야
제작 : 장 프랑소와 르쁘티
촬영 : 요르고 아르바니디
출연 : 카롤린 듀세/사가모르 스테브넹/프랑수와 베를리앙/로코 시프레디
제작년도 : 1999년

프랑스의 여성 감독 까뜨린 브레이야가 만들어 외설 시비까지 이끌어 내었던 ‘로망스’는 페미니즘적 관점에서 기존 여성에 대한, 그리고 남성에 대한 관념이나 이미지를 전복시켜 표현한다. 주류 상업 영화에서 나타나는 남성의 성적 욕망과 여성의 대상화는 철저하게 그 자리를 바꾼다.

초등학교 교사인 마리는 모델인 남자 친구 폴을 깊이 사랑한다. 그러나 폴은 오랜 동거 기간 동안 마리와의 정신적인 사랑만을 유지하고 성적 관계는 계속 피한다. 마리는 사랑하는 폴에게서 육체적인 사랑을 나눌 수 없음을 절망하면서 성적 방황을 하게 된다. 까페에서 우연히 만난 파올로라는 중년 남자로부터 육체적인 사랑을 경험한 후 다시 자신이 일하는 초등학교 교장 로베르와의 사도 마조히즘까지 경험하면서 방황하던 마리의 자아 동일성은 주체적으로 재정립되고 자신을 외면하는 폴을 잔인하게 복수하는 것으로 영화는 끝난다.

이 영화에서 특기할 만한 점은 남성이 예전까지 그려졌던 애매모호한 존재로서의 여성과 다를 바 없이 묘사되고 여성이 오히려 내러티브의 중심에 서서 자기 의식의 명확함을 드러내면서 계속적으로 자기 내면에 질문하고 귀기울인다는 점이다. 폴은 그 뒤바뀐 남녀 표상의 한 쪽 극에 있다. 마리는 폴을 끊임없이 욕망하지만 폴은 마리를 진심으로 사랑하는지, 만일 사랑한다면 왜 그녀와 성관계를 맺으려 하지 않는지 알 수가 없고 왜 점점 그녀를 멀리하면서 개인적인 생활에 젖어드는 것인지, 그리고 왜 마리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나이트 클럽에서는 다른 여자에게 끈적끈적한 시선을 보내면서 정복욕을 불태우는지 마리는 이해할 수 없다는 넋두리가 계속된다.
폴은 정말 이 영화에서 특이한 인물이다. 그는 성적 욕구를 지극히 통제할 수 있거나 또는 스스로 억압하면서 사랑이란 플라토닉이 진실한 것이라는, 사랑은 섹스 없이 가능하다는 생각을 하는 듯하다. 그러면서도 마리를 기만하고 다른 여자에 대한 정복욕을 품는 것을 보면 폴은 마리 또한 일종의 정복의 대상으로서, 이미 정복한 대상이므로 더 이상의 투자는 불필요한 것으로 생각하는 듯하다. 그러면서도 그는 마리에게 다른 여자는 만나지 않으며 성관계도 맺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실제로 그는 마리와 성관계를 맺지 않는 것처럼 다른 여자와도 성관계를 맺지 않을 것이다. 그에게 성적 욕망이란 과연 부재하는 것일까?
아마도 그에게 있어 성적 욕망은 정복욕이라는 것으로 대체된 듯하다. 그리하여 그는 여성이라는 존재를 성교할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정복할 대상으로 파악하고 있으며 성교는 종족 번식이라는 인적 재생산을 위한 도구로서만 인지하는 듯하다. 그리고 그는 남성과 여성에 대한 관념이 차별적으로 구별되어 있다(이 영화에서 마리와의 유일한 성관계 장면에서 마리가 ‘내가 남자가 되고 당신이 여자가 되어’라는 성역할 교환 또는 뒤바꿈의 제안이 나오자 성관계를 거부하고 마리를 내팽개친다). 그에게 있어 남성·여성이라는 성(gender 또는 sex)에 대한 관념은 고정된 체계로서 전복 불가능하게 구분지워진 관념으로 자리잡은 것 같다.
추측하건대 그는 엄격한 교육(가부장제적 이데올로기 교육)을 통해 성적 욕망이 금기시되거나 억압받아 왔을 것이며 따라서 성이라는 것은 번식 이외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억눌린 성적 욕망을 정복욕이라는 일종의 폭력적·기만적 성향으로 대체시켰을 것이다. 따라서 그는 마리와 성적으로 대비될 뿐만 아니라 욕망에 대한 솔직함에 대해서도 대비되는 존재로서 상징되고 있는 것이다.

반면에 마리는 자신의 성적 욕망에 솔직하다. 그녀는 폴을 끊임없이 욕망하지만 그것은 폴의 관념 앞에서 좌절되고 그 좌절된 욕망은 다른 남성을 향하는 것이다. 그녀도 성적 욕망에 대하여 솔직하면서도 일종의 환상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 그 환상이라는 것은 자신의 성적 욕구는 남성에 의해 수동적으로 충족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마리는 계속 폴의 성기에 집착하고 손과 입으로라도 그것을 소유하려 한다. 이것을 여성의 거세 콤플렉스에 기인한 남성 성기에 대한 동경과 같은 방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지나친 확대 해석일 것이다. 그 환상은 파올로와의 성관계, 건달에게 자신의 몸을 파는 행위, 그리고 로베르와의 사도마조히즘적 의식을 통해 욕망에 솔직할 수밖에 없는, 그리고 그 욕망은 스스로 해결할 수밖에 없다는 자각만이 남게 된다.

이 막다른 길에서, 또는 새롭게 열린 길에서 그녀는 자신의 욕구마저 억누르고 기만하려 하는 폴에 대해 처절하게 복수하는 길을 선택하는 것이며 자아에 대한 깨어있는 삶을 기약하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까뜨린 브레이야가 말하려던 것은 아마도 여성도 남성만큼이나 자신의 욕구에 충실할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는 것이 아닐까. 그 과정에서 과연 욕구는 억눌려야 하는가 자유로와야 하는가에 대한 반성을 유도하는 것일 테고, 동시에 거기에 대한 해답은 마리와 폴의 대립적 관계 속에 녹아 있는 것일 터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기존 사회가 억압하거나 숨겨 온 여성의 성적 욕망마저 끄집어 내면서 인간이 스스로 억누르는 내면적 욕구에 귀기울일 때에 한 개별 인간을 이루는 정신은 건강함을 유지할 수 있다, 그러니 우리를 억압하는 것들을 전복하자라는 도발적인 제안을 하는 것이다.

쿤둔

감독 : 마틴 스콜세지
각본 : 멜리사 매티슨
제작 : 바바라 드 피나, 멜리사 매티슨
출연 : 텐진 듀톱 차롱, 규메 테통, 툴쿠 잠양 쿵가 텐진, 텐초 예쉬 파이창, 텐초 걀포, 체왕 미규 캉사
제작년도 : 1998년

‘당신은 진정으로 부다입니까?’ ‘나는 그림자이다. 물 위에 비치는 달과 같다. 중생들은 나를 통해 자신의 내면을 비추어 줄 뿐이다. 중생의 열반은 내가 해 주는 것이 아니다. 열반은 자신만이 할 수 있다.’

이 영화는 모든 중생이 한 명도 남김없이 열반에 이르기 전까지 자신의 열반을 유보한 현생 부처 14대 달라이 라마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이다. 그는 중생의 열반을 위해 14번째의 윤회를 돌아 두 살 박이 아이가 되어, 달라이 라마의 빈 자리를 대신하는 섭정에게 인도되어 세상에 나타난다. 그는 공산화된 중국에 침략당하는 티벳을 구제하기 위한 무거운 짐을 안고 태어났다.

사실 그는 모든 티벳인들의 그 순결한 정신이 그 순결한 정신을 끊임없이 더럽히려는 세상에 대해 자신들을 인도할 하나의 기둥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상관없다. 결국 달라이 라마라는 존재를 달라이 라마답게 할 수 있는 티벳인들의 종교적 정신의 힘이 분명히 있다는 것만이라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우리와 같은 뿌리를 지니고 있을 그들에게는 우리는 잃어버린 것 같은 정신의 순결함이 아직도 흐르고 있다.

종교적 삶이 정치적 현실에 핍박받을 때, 중국이 티벳을 복속시키려 할 때 태어난 티벳의 종교적, 민족적 지도자 쿤둔은 어쩌면 스콜세지의 눈에는 뉴욕의 더러운 거리에서 피어나기를 바라는 구원의 존재와 겹쳐져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스콜세지는 선과 악, 핍박하는 이와 핍박받는 이의 구도는 피하는 것 같다. 달라이 라마로 대표되는 티벳의 종교는 하나의 민족이라는 범위에서만 틀지워지는 것이 아니어서, 쿤둔은 유럽의 중국에 대한 침략의 역사를 이해하려 하고 모택동을 악인으로 단정하지도 않는다. 어떠한 방법으로든 폭력은 정당화될 수 없다는 그의 말은 그가 앞으로 비폭력의 투쟁을 해 나갈 대상이 무엇인가를 말해 준다.

혹시 섭정이 아이를 잘못 찾은 것은 아닐까라는 쿤둔의 회의에는 정치적 현실에 대해, 고통받는 중생에 대해 한없이 무기력한 자신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어 어린 나이에 무거운 사명을 짊어진 그에 대한 인간적인 연민까지 불러 일으킨다.

정서적으로 동화된 상태에서 영화를 따라가다 보면 자연히 생기게 되는 티벳의 정치적 현실에 대한 우호적인 태도는 오히려 부수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색모래로 쌓아올린 겹겹의 만다라를 쓸어 모아 강물에 경건하게 붓는 신은 티벳 불교가 추구하는 궁극의 이상을 이 모자란 머리와 가슴에 어렴풋이나마 심어주기 때문이다.

순진하기까지 한 순결한 정신을 만나는 것은 내가 부다에게 입는 은혜일지도 모른다. 헐리웃의 그네들도 그러해서 티벳을 사랑하는 것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