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우리를 가짜 행위(false activity)란 개념으로 데려다 준다. 사람들은 뭔가를 바꾸기 위해 행동할 뿐만 아니라 어떤 일이 발생하지 않게 하기 위해, 아무것도 바꾸지 않기 위해 행동할 수도 있다. 거기에 강박신경증자의 전형적인 전략이 있다. 그는 실재적인 것이 발생하는 것을 막기 위해 죽기 살기로 활동한다. 이를테면, 어떤 폭발 직전의 긴장 상태에 있는 집단에서 강박적으로 행해지는 대화는 항상 어색한 침묵 상태를 예방하기 위해서 이루어진다. 그 침묵 상태가 참석자들에게 잠재된 긴장을 대면하도록 압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신분석 치료 중 강박신경증자는 분석가에게 끊임없이 사건 사고, 꿈, 자기 인식의 말들을 쏟아낸다. 하지만 그의 끊임없는 발화 행위는 만약 잠시라도 말을 멈춘다면 분석가가 진실로 문제 되는 것을 물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지속되는 것이다. 달리 말해, 그들은 분석가를 꼼짝 못하게 하려고 말을 한다.

오늘날 진보 정치의 많은 부분에서 직면하는 위험은 수동성에 있는 게 아니라 유사 능동성, 즉 활동과 참여의 몰입에 있다. 국민들은 항상 개입하여 ‘뭔가를 하고자’ 애쓰고, 학계는 끊임없이 의미 없는 논쟁에 참여한다. 진정 어려운 것은 한발 물러서서 활동을 그만두는 것이다. 권력을 가진 자들은 때론 비판적인 참여를 침묵보다 선호한다. 그들은 우리를 대화에 참여시켜 우리의 불길한 수동성이 파괴되었음을 확신시킨다. 실제로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게 하기 위해 항상 활동 중에 있는 이런 상호 수동적 상황에 맞선 비판의 첫걸음은 수동성 속으로 물러나는 것, 참여를 거부하는 것이다. 이 첫걸음은 진실한 활동, 즉 좌표계 전체를 실질적으로 바꿀 그런 행위의 토대를 밝혀준다.

슬라보예 지젝, 「진짜와 가짜 : 라캉, 마니차를 돌리다」, 『HOW TO READ 라캉』

만일 소설의 내재적 구조에서 어떻게 그런 상이한 독해가 이루어질 수 있는지 파악해 본다면, 우리는 차라리 소설 그 자체가 존재론적으로 개방되어 있다는 것, 즉 “종결되지 않았”고, 비일관적이며, 적대에 의해 가로질러져 있다고 보는 것이 더 나을지 모른다. 나는 여기서 전통적인 헤겔적 요지를 지적하고자 한다. 변화는 외부에서 오지 않는다. 사태를 변화시키기(혹은 사태가 변화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그 정체성이 이미 “모순적”이어야 하고, 비일관적이며, 내재적 긴장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존재론적으로 “개방되어” 있어야 한다.

슬라보예 지젝, 「마르크스, 객체 지향적 존재론을 읽다」, 『다시, 마르크스를 읽는다』

한 사회에 속한다는 것은 무조건적으로 강제되는 것을 자유롭게 수락하도록, 즉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으로 받아들이도록 요구하는(우리 모두는 우리의 조국과 부모를 사랑해야 한다) 역설적인 지점을 내포한다. 어떤 경우든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을 자진해서 하는(자유롭게 선택하는) 이 역설, 자유로운 선택이란 실제로 없으면서도 마치 있는 것처럼 가장하는(그런 외관을 견지하는) 이 역설은 텅 빈 상징적 제스처, 거절하도록 되어 있는 증여의 제스처에 항상 따라붙는다.

『HOW TO READ 라캉』, 슬라보예 지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