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회에 속한다는 것은 무조건적으로 강제되는 것을 자유롭게 수락하도록, 즉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으로 받아들이도록 요구하는(우리 모두는 우리의 조국과 부모를 사랑해야 한다) 역설적인 지점을 내포한다. 어떤 경우든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을 자진해서 하는(자유롭게 선택하는) 이 역설, 자유로운 선택이란 실제로 없으면서도 마치 있는 것처럼 가장하는(그런 외관을 견지하는) 이 역설은 텅 빈 상징적 제스처, 거절하도록 되어 있는 증여의 제스처에 항상 따라붙는다.
『HOW TO READ 라캉』, 슬라보예 지젝
인용
감각, 기억과 감정
[조안이 당신 이야기를 자주 했어요. 다시 재회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요. 아, 그리고…….]남자는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밀었다.
[이걸 당신에게 전해달라고 했어요.]그가 내민 것은 작은 유리병이었다. 찰랑거리며 흔들리는 액체가 담겨 있었다. 아주 오랜만에 보는 것이었으나 무엇인지 모를 수는 없었다.
단희는 손을 내밀어 유리병을 받았다. 조심스럽게 밀봉된 필름을 벗겨냈다. 뚜껑을 열려고 했지만 손이 떨려서 유리병은 자꾸 손에서 미끄러졌다.
[제가 도와드릴게요.]남자는 단희에게서 유리병을 건네받으려고 했다.
그러나 넘겨주는 순간 단희가 심하게 손을 떨었고 병은 그만 바닥에 떨어져 엎질러지고 말았다.
단희는 그 즉시 방을 채우는 어떤 입자들을 느꼈다. 입자들은 일렁였고 공기 중으로 빠르게 흩어졌다. 단희는 희미하게 감지되는 의미를 읽을 수 있었다.
[‘양말이 사막 구석에서 모자를 쓰고 발견되었다…….’]그러나 이제 단희에게도 입자들은 의미라기보다는 냄새에 가까워졌다. 둔감해진 후각기관은 한때 조안이 했던 것처럼, 공기 중에서 어떤 기억과 감정을 읽었다. 입자들이 단희를 그 시절로 데려갔다. 의미로는 포착할 수 없는 것들에게로. 추상적이어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 너무 구체적이어서, 언어로 옮길 수 없는 장면으로. 조안이 말했던 그 공간들로.
<숨그림자>, 김초엽
기억

그렇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일까. 사람이 사람을 기억하는 일, 이 세상에 머물다 사라진 누군가를 기억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기억되고 싶을까. 나 자신에게 물어보면 언제나 답은 기억되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내가 기원하든 그러지 않든 그것이 인간의 최종 결말이기도 했다. 지구가 수명을 다하고, 그보다 더 긴 시간이 지나 엔트로피가 최대가 되는 순간이 오면 시간마저도 사라지게 된다. 그때 인간은 그들이 잠시 우주에 머물렀다는 사실조차도 기억되지 못하는 종족이 된다. 우주는 그들을 기억할 수 있는 마음이 없는 곳이 된다. 그것이 우리의 최종 결말이다.
최은영, 밝은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