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
제목부터 끌린다.
임진강을 끼고 언제나 안개 자욱한 자유로와 전차를 흔치않게 보게 되는 통일로, 그 사이로 보이는 논과 밭과 볼품없는 집들.
남한의 북단에 있으면서도 개발의 거품에 전염되고 있는 이상한 변두리 파주.
그 곳 파주, 안개, 학생운동, 재개발, 철거민, 그리고 형부와 처제…
이상하다.
몇 개의 단어들, 현묘 玄妙, 글자 그대로 어둡고 묘한 것이 나를 끌어 당긴다.
나는 이미 파주의 걷어낼 수 없는 안개에 휩싸여 있다.
그러니까 이 글은 파주를 보고 난 다음이 아니라 보기 전에 이미 꽂혀 버린 내 상태를 말하고 있다.
나는 이미 거부할 수 없는 상태에 다다랐고 고비가 될 이번 주말까지 스크린에 걸려 있기만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
이제 침침한 안개 길을 비겁하게 동행자 따위 필요 없이 혼자라도 걸어 들어가야겠다 ㅡ.ㅡ;

예전부터 눈여겨 보는 몇 안 되는 평론가 중 한 명이 황진미다.
이번 호 씨네21에 실린 ‘굿모닝 프레지던트’에 대한 황진미의 글을 보면서 또 한 번 감복했다.
그녀는 거침없이 분석하고 비판한다.
언제나 그녀의 글에서는 보편적인 진리의 강연장의 엄숙함보다 치열한 논쟁 가운데 있는 듯한 생생한 긴장이 느껴진다.
급박하고 치열한 논쟁, 피할 수 없는 지점에서 ‘자, 이제 선택해야만 해’라면서, 물러설 곳 없는 곳에서 포기할 수 없는 독단을 상대방을 향해 내던지는 듯하다.
논쟁거리를 펼쳐놓고 파고들고 정확히 움켜쥐는 그녀의 거침없는 똘끼와 쌈닭 기질은 비평이 해 낼 수 있는 파괴와 생산의 힘을 표출한다.
통쾌한 진미 누님 최고!

전쟁은 참혹하다.

전쟁영화는 서로 죽고 죽이는 대결 속에서 참혹하게도 자아 경멸적인 쾌감을 불러 일으킨다.
그러니까 전쟁영화는 소위 휴머니즘을 설파하려는 와중에도 아군과 적군을 판별하고 죽고 죽이는 관계에 대한 가학적 피학적 욕망을 동시에 분출한다.
전쟁영화를 보면서 사상과 정치적 노선의 옳고 그름, 정의 따위를 고민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이고 그 영화는 예선 탈락이다.
다시 말해 전쟁영화에서는 인간의 상징적 질서들이 삶과 죽음 사이의 충동 앞에서 주도권을 잃고 무너져 내린다.
그래서 나는 상징적 질서 스스로가 초래한 붕괴, 인간 문명의 자살적 제스처야말로 전쟁영화가 다루어야 할 어떤 핵심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난징! 난징!>을 보면서 드는 잡념들이다.
남경을 점령하고 나서 학살, 약탈, 강간 등 온갖 파괴적 행위를 일삼는 일본군은 당연히 파괴의 집행자.
살기 위해 난민촌의 동료들을 배신하거나 자존을 포기해 가는 중국인은 무너지는 상징적 질서의 다른 한 측면이다.
삶과 죽음 앞에서 아군과 적군의 질서는 모조리 붕괴했고 이 폐허 위에 다시 무엇을 세울 수 있을지 먹먹하고,
마치 포탄으로 파괴된 현장에서 넋을 잃은 아이처럼 자아를 잃은 카메라는 멍하다.
황량한 건물 뼈대만 남은 남경의 1938년은 삶과 죽음 충동 말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리고 가도카와의 말처럼 인간의 질서가 무너진 바로 그 곳에서는 ‘살아가는 것이 죽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다.’
그것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자살할 만한 값어치가 없다는 감정으로 살아간다고 한 벤야민은 자살하기 직전까지 질서의 불안을 무엇으로 견뎌 냈을까…
덧글 :  배신에 대한 역사적, 정치적 처벌이 아직 온전치 않기 때문에 이를 응시할 수 있는 지평이 없는 한국에서는 아직 이런 전쟁영화가 불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