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립하는 동일자
군대는 왜 동성애자를 공개적으로 허용하는 일에 그토록 강력히 저항하는가? 여기에는 오직 하나의 일관된 대답만이 가능하다. 군대라는 공동체의 소위 남근적이고 가부장적인 리비도 경제에 동성애가 위험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군대의 리비도 경제학 자체가 ‘좌절되고 부인된 동성애’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동성애는 군대에 필요한 남성적 유대감의 핵심 요소인 것이다. ···(중략)··· 여기서 놓쳐서는 안 되는 핵심은 이것이다. 군대에는 극단적이고 폭력적인 동성애 혐오와 좌절되고 거부된 ‘지하’ 동성애적 리비도 경제학이 위태롭게 공존하고 있으며, 이러한 사실은 군대 공동체의 담론이 자신의 리비도적인 토대를 배척하는 방식으로만 작동한다는 점이다.
철학이라는 질병
철학에 관한 최고의 농담 가운데 하나는 카판타리스 교수가 트위터에 올린 이야기일 것이다. “학위명에 ‘닥터’라는 단어가 있지만 난 의사가 아니고 철학 박사라고 했더니, 4살 된 아들 녀석이 ‘철학이 질병인가요?’라고 일갈했답니다.” 철학의 본질은 바로 이것이다. 철학은 일종의 병 혹은 인간 정신의 기능 장애인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후기 비트겐슈타인이 옳았다. 그러니까 철학적 문제는 언어의 부적절한 사용 때문에 발생하므로, 우리는 일상 언어를 적절히 사용하는 것으로 병을 낫게 할 수 있다. 문제는, 당연한 말이지만 언어에는 본래적으로 언어의 오용이 포함되기 때문에 이를 실천하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역사 상대주의의 비역사성
옳지 않은 일을 보았을 때 시대적인 상황을 거론하며 이를 역사 상대주의로 감싸는 일, 이를테면 “그는 인종차별이나 반여성주의가 횡행하던 시대를 살았으니 지금 기준으로 그를 판단해서는 안 된다”와 같은 의견 피력은 잘못된 것이다. 우리는 정확히 그렇게 판단해야 한다. 즉 과거의 잘못을 지금의 기준으로 재단해야 한다. 우리는 과거 여러 세기 동안 여성이 어떻게 대우받았는지, 자비로운 ‘문명인’이 어떻게 노예를 부렸는지에 대해 충격을 받아야 한다. 역사 상대주의의 맹점은 그것이 진정으로 역사적이지 않다는 사실에 있다. 그 관점이 발화하는 곳은 순수한 메타언어의 지점이다. 그것은 내가 나 자신을 배제한 채 모든 시대를 중립적으로 비교할 수 있다고 믿는 자만과도 같다.
항거하는 프리덤의 시대는 위기
불안과 공포로 가득했던 그 상황은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었다. 그리고 그 자유는 리버티가 아닌 프리덤이었다. 리버티가 정착된 것은 전쟁 이후 일상이 회복된 이후였다. 오늘날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의 침공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은 프리덤을 실현하고 있으며 그들이 장차 이룩하고자 하는 것은 리버티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개념 구분을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을까?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규범을 무시하고 자유롭게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지는 상황이 다가오고 있지 않은가? 오늘날 우리는 어느 때보다도 좌익 반체제 운동에 맞선 우익 포퓰리스트 반란을 목격하고 있다. 2021년 1월 6일 트럼프 지지자들이 의사당을 점령한 것도 자유를 수호한다는 명목하에 벌어진 일이 아니던가? 시위대가 의사당에 난입한 사건에 좌파와 자유주의 계열의 사람들이 공포와 부러움이 섞인 시선을 던진 것도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평범한’ 사람들이 신성한 권좌에 난입한 일은 공공의 규칙이 잠시 중단된 축제와도 같은 순간이었다···. 사건을 비판하는 목소리에 약간의 부러움이 섞인 것은, 우파 포퓰리스트들이 좌파의 전매특허인 항거의 목소리를 빼앗았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부패한 엘리트가 통제하는 의회 선거와 우파 포퓰리스트가 통제하는 봉기 사이에서 하나를 택하는 일일까?
프리덤을 위해 투쟁하는 진정한 프롤레타리아
우리는 대부분 사회적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어떤 식으로든 점차 프롤레타리아의 삶으로 미끄러진다. 심지어 우리는 사회적 계층의 하층으로 향하는 행보에서도 실패하게 된다. 즉 완전한 프롤레타리아인 ‘잃을 것이 사슬밖에 없는’ 상태가 되기보다는 최소한의 사회적 조건들을 어떻게든 유지하게 된다. 이러한 현실 앞에 오늘날 서구 급진 좌파들은 교착 상태에 빠진다. 그들은 각자의 나라에서 ‘진정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난망해진 상황에 실망하고 있으며, 타락하고 무기력한 지금의 노동 계급 대신 혁명적 주체로 스스로를 투신할 진정한 프롤레타리아트를 절박하게 찾고 있다. 하지만 최근 가장 있기 있는 노동 계급은 유목민적 이주민이다.
오직 차이 그 자체의 정체성만이
헤겔에게 정체성이란 가장 근본적인 형태의 차이다. 어떤 사물의 정체성이 다른 사물과의 차이에 의해 정의된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지만, 동시에 정체성은 사물이 자기 자신과 맺는 차이를 가리킨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즉 정체성은 사물이 자신을 구성하는 개별적 속성(이 속성들 각각은 다른 사물들과 공유될 수 있다)들과의 차이를 의미한다. 사물은 그 자체의 ‘속성’이 아니라 그 속성을 담고 있는 고유한 ‘그릇’이기 때문이다. ···(중략)··· ‘정체성’만이 자기반성적(혹은 자기 관계성)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차이’도 가장 근본적이고도 불가능한 실재로서의 고유한 정체성을 가진다. 이때 차이는 둘 사이의 환원될 수 없는 별개의 개체로 존재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차이에는 세 가지 요소가 작용하고 있다. 대립하는 두 요소와 그와 별개로 존재하는 차이 ‘그 자체’가 그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남녀의 성별 외곽에 존재하는 트랜스젠더라는 존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중략)··· 즉 가장 근원적인 것은 대립 그 자체다. 성의 경우, 성별의 차이 자체에 몸을 부여하는 제3의 요소는 트랜스-주체trans-subjects다. 그들은 성별 차이의 외부 존재가 아니며, 원초적인 다형성이나 도착적인 다수성에서 파생된 잔여물도 아니다. 그들은 성별의 차이 자체를 구성하는 존재이며, 긍정적인 존재로서의 특권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다. 우리가 정체성 정치를 주장해야 할 때는 오직 이러한 경우뿐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정체성’은 차이의 실재 자체에 몸을 부여하는 정체성이다.
자유 : 치유할 수 없는 질병, 슬라보예 지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