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닝 스톤>

밥은 어린 딸 콜린의 첫 성찬식 드레스 만큼은 빌려 입히고 싶지 않았다. 밥은 다가오는 성찬식이 콜린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날이라고 생각한다. 콜린이 어떻게 여기든 밥의 마음은 그렇다. 그 날 콜린은 밥의 마음에 흡족한 새 드레스를 입고 제단에 올라야 한다. 실은 새 드레스와 구두를 살 100파운드 남짓이 밥에게는 없다. 요금을 내지 못해 전화도 끊길 만큼 형편이 어려운 밥은 지금 실직자다. 그런 밥에게 콜린에게 입힐 새 드레스는 사치스러워서 허영에 가깝다. 그래도 밥은 무슨 일이 있어도 새 드레스를 살 돈을 만들겠다고 고집한다.

<레이닝 스톤>을 움직이는 감정적 힘은 밥의 고집이다. 나는 신념이 아니라 고집이라고 말하고 싶다. 밥은 가부장의 얼굴을 하고 종교 의식에 과도하게 의미를 부여한다. 성찬식의 새 드레스는 딸 콜린이나 아내 앤이 아니라 밥의 의지다. 밥은 이를 관철하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할 기세다. 그 고집이 자신과 가족에게 닥친 빈곤의 고난을 가중시킨다고 해도 말이다. 이를 타당하게 설명할 이론이 밥에게는 없다. 차라리 밥은 가부장의 권위와 종교적 의지라는 텅 빈 고집을 밀어붙이면서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고 말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 영화를 종교적 신념과 가족의 생계를 모두 책임 지려는 아버지의 안타까운 고군분투로 정리하고 싶은 유혹에 대해 스스로 이렇게 반문한다. 밥은 왜 콜린의 성찬식 새 드레스를 고집하는가. 그는 무엇에 대항하여 그것을 고집하는가. 콜린의 새 드레스가 고집해야 할 대상이 되는 이유는 그가 가난한 실업자이기 때문이다.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중산층이었으면 아무 일도 아니었을 드레스 한 벌을 두고 밥은 자신의 가난과 싸우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가부장제와 종교라는 밥의 이데올로기적 고집이 빈곤 앞에서 세상과 불화하는 방식을 드러낸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돌이켜 보면 이 영화에서는 빈곤으로 인해 이데올로기적 도덕률과 불화하는 다양한 양태를 지켜볼 수 있다. 밥과 이웃집 친구 토미는 방목하는 양과 보수당 당사 앞 잔디를 훔치며, 토미의 딸 트레이시는 마약을 팔아 돈을 번다. 그들은 돈을 구할 수 있다면 닥치는 대로 무엇이든 할 것이다. 건너 집 가난한 30대 여성은 절도 행위로 검거된 후 세 아이를 두고 목숨을 끊는다. 밥은 사채업자의 협박에 저항하다 살인 사건에 휘말리며, 밥을 도우려는 신부는 그가 사채업자의 사망 현장에 있었다는 사실을 숨기려 한다. 이처럼 이데올로기적으로 논쟁적인 상황은 시종일관 빈곤을 향하고 있다. 즉 가난한 이들에게 빈곤은 도덕에 선행하는 문제라는 것이다. 빈곤은 이데올로기의 텅 빈 실체를 드러낼 뿐이며, 노동은 신성하다는 좌파적 이데올로기도 무의미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딸 트레이시가 쥐어 준 용돈을 손에 구겨 넣고 혼자 서럽게 흐느끼는 토미에게 나는 가부장제적 맥락에서 아버지에 대한 동정심을 가지지 않을 도리가 없다. 성찬식에서 밥의 비밀을 숨긴 신부가 밥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하는 빵 조각을 건네는 장면에서는 가련한 밥을 종교적 맥락 안에서 안타까워 하는 감정을 키우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이 영화가 이데올로기적 현실과 일으키는 긴장은 빈곤에 처한 삶의 실체를 총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이데올로기적 맥락을 경유하려는 태도에서 발생한다. 모순은 중층 결정된다는 오래된 정식을 영화적으로 실천하려는 것처럼.

사채업자가 예고 없이 밥과 앤의 집에 들이닥쳐 빚을 갚으라고 협박하는 장면에서 콜린의 눈빛을 나는 잊을 수 없다. 사채업자가 테이블을 쓸어 버리며 앤을 윽박지르는 동안 이를 지켜보는 딸 콜린의 얼굴은 무표정하다. 그것은 상상할 법한 것이라기보다 현실에서 있을 법한 얼굴이다. 이 자본주의적 트라우마를 담을 감정이 아직 콜린에게는 없다. 두려움에 떨거나 폭력에 분노하는 것은 오히려 어른의 몫이다. 그 순간 콜린은 빈곤이 야기하는 사회적 효과가 어떤 것인지를 텅 빈 감정으로 관찰한다. 황급히 돌아온 아빠 밥에게 사채업자가 엄마의 결혼 반지를 빼앗아 갔다고 전하는 콜린의 목소리는 침착하다. 이처럼 담담한 콜린이 나를 불안하게 만든다. 이 텅 빈 목격자에게 세계의 진실이 폭로되는 것만 같기 때문이다. 이제 콜린에게 세계의 진면목은 예수의 피를 상징하는 포도주가 아니라 앤이 살피는 신문 모퉁이의 구인 광고나 밥이 사채업자에게 진 빚에 존재하게 될 것이다.

<레이닝 스톤>은 밥과 토미, 그리고 그들의 가족을 구원할 수 없다. 성찬식이 끝난 후로도 그들 앞에는 새로운 고난이 기다릴 것이다. 이 영화가 제시하는 실직 노동자가 처한 빈곤의 비참은 밥의 장인이 전하는 구호 이상의 문제이며, 밥의 비참이 긴급한 데 비해 세계는 강고하게 모순적이다.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이런 세상을 이대로 두면 안 된다는 마음이 생긴다면 바로 그것이 이 영화가 해 내는 성취일 것이다. 차를 잃고 난망해 하는 밥과 토미를 진심으로 걱정하며 함께 거리를 서성이는 펍의 이웃 같은 마음이 우리 모두에게 일어날 수 있다고 믿는 것, 그것이 이 영화가 세계에 표방하는 유일한 낙관일 것이다.

영화와 예술이 인간 세계를 향해 말을 거는 매혹적인 타자라고 할 때 우리는 흔히 그 매혹성에 집중하게 된다. 분명 어떤 작품은 발굴해야 할 미지의 비밀을 간직한 것처럼 나타나 자신의 존재를 세계에 알린다. 그러나 <레이닝 스톤>을 비롯한 켄 로치의 영화들은 그런 태도와 거리가 멀다. 숏과 숏 사이의 비밀을 파헤치는 것이 그의 작품에 대해 생각하는 작업으로는 언제나 부족한 시도로 보인다. 그의 영화는 오히려 미적 존재감을 표출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처럼 보인다. 대신 작품이 애쓰는 것은 지금 이 세계에 필요한 말을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인간 세계의 구체적 삶을 이해하고 구하기 위해 필요한 말을 꺼내고 있는가에 관심을 쏟는다는 점에서 켄 로치의 영화는 존재의 고유성을 다루는 예술의 세계에서 별나게 고유한 존재다. 켄 로치에게 영화적 순간은 미학적 고유성을 증명하는 순간이라기보다 사회적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오해가 없도록 덧붙인다면 절제된 미학이 사회적 진실과 만나고 있음을 깨닫는 순간이다. <레이닝 스톤>에서 콜린의 눈빛이 실업과 빈곤이 야기하는 메마른 상처의 실체를 드러내듯이 말이다. 그것이 놀랍고 존경스럽다고 지금껏 생각해 왔다. <레이닝 스톤>을 만난 이후부터 나는 줄곧 그런 마음을 품고 있다.

철학자 한병철이 쓴 <피로사회>는 앞서 묘사한 궁지를 자기 착취와 과잉 커뮤니케이션의 결과라고 진단한다. 집단적 ADHD(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를 앓듯 우리가 매일 벌이는 강박적인 멀티태스킹을, 먹는 동안에도 먹이에 몰입하지 못하고 주변의 사태를 살펴야 하는 야생동물의 습성에 비한다. 저자는, 좋은 삶에 대한 관심은 생존에 대한 관심에, 변화를 추동할 힘을 가진 깊은 분노는 쓸데없이 휘발하는 가벼운 짜증에 자리를 내주었다고 지적한다.

‘피로사회’로부터의 도피, 삶을 주시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로서의 영화관을 생각하다, 김혜리

<미쓰 홍당무>

고교 시절 왕따였던 양미숙은 졸업 여행 기념 사진을 찍을 때조차 반 친구들이 곁을 내 주지 않아 무리들 뒤에 파묻힌 존재였다. 학생들은 돌아가며 스크럼을 짜서 양미숙이 파고들 틈을 틀어 막고 밀어 냈다. 영화에서 중요하게 반복되는 대사처럼 사람이 비상식적인 행동을 할 때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양미숙의 비상식적, 병리적 행동의 배경에는 배제되고 멸시 당한 상처의 역사가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미쓰 홍당무>는 양미숙의 역사를 길게 풀어 내며 그를 관객에게 이해시키려 하지 않는다. 영화는 학급 친구들 뒤로 밀려나 가려지는 불쌍한 양미숙이 아니라 그럼에도 무리 위로 뛰어올라 기어코 기념 사진에 찍히고야 마는 양미숙의 악다구니를 보여 주며 시작된다. 졸업 여행 기념 사진 속 양미숙의 얼굴은 독기를 품고 일그러져 있다. 양미숙이라는 인물을 소개하는 방식 만큼이나 영화는 그럴 만한 이유보다 비상식적 행동에 관심이 있다.

영화는 양미숙의 화법으로 양미숙을 보여 주려 한다. 그에게 새겨진 투쟁심, 집착, 교활함, 두려움 등은 이 영화 곳곳의 대사와 양식에 내포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화면 바깥의 목소리를 삽입하는 방식은 너무나 기괴하여 계속 생각하게 된다. 양미숙이 서종철 선생과 모텔에서 잠자리를 가진 날 아침, 서종철이 끝내 양미숙의 마음을 부정할 때 돌연 들리는 학생들의 책 읽는 소리는 서종철이 집으로 가 부인 성은교에게 “사랑해, 여보”라고 말할 때까지 장면과 상관 없이 울린다. 말 그대로 에코, 메아리 같은 이 소리는 순간 아찔하게 정신적 공황을 일으킬 것 같은 순간을 만든다. 교장 선생의 명상 방송 소리, 학교 축제 공연 호출 방송 소리, 양미숙과 서종희의 공연 소리도 포함해야 할 이 화면 바깥의 소리는 이명과도 같이 이야기의 흐름에 정신적 혼미함을 가져 온다. 이경미 감독의 인장과도 같은 이 느닷없이 화면과 어긋나며 울리는 기괴한 목소리는 영화가 양미숙의 신경증적 불안을 드러내는 데 관심이 있음을 보여 준다.

이 영화가 의미 있는 작품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여성이 영화의 서사와 욕망 전부를 구성하는 드문 한국 영화라는 점과 더불어 왕따 양미숙(과 서종희)에 대해 말을 하기보다 되도록 양미숙의 말을 하려 한다는 데 있을 것이다. 구성과 리듬이 복잡하고 어지럽지만 이야기가 치고 나가는 힘을 지닌 것은 양미숙이 품은 욕망과 망상의 에너지를 가공하지 않고 표출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 영화는 양미숙의 욕망과 망상의 에너지로 웃음을 생산하며 앞으로 나아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양미숙의 컴플렉스와 불안이 야기하는 소동극에 대한 웃음과 비웃음의 경계가 아슬아슬한 것은 아닐까 주저하게 된다. 양미숙이 상황을 이해하거나 결핍을 해결하는 비상식적 방식을 충분히 그럴 만하다고 납득하기는 쉽지 않기 때문에 그 기괴한 감정을 해소하려는 웃음이라는 효과가 자칫 위험해 보이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 이상한 영화가 끝나고 나면 조용히 양미숙을 응원하는 마음이 생길지도 모른다. 방식은 삐뚤어 이상할지라도 지치지 않고 시도하는 양미숙은 사람들이 자신을 비웃는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영화 <미쓰 홍당무>의 소수자성은 이 비웃으며 응원하는 마음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