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r From Heaven poster: woman in a red coat and scarf in the foreground, two men in the background, film title bottom right.

<파 프롬 헤븐>

<파 프롬 헤븐>을 멜로드라마라고 부를 수 있을까. 넘기 힘든 운명 앞에 선 인물의 울혈적 감정이 불러일으키는 감흥을 멜로의 핵심이라고 한다면 이 영화를 그 맥락에서 보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멜로적 감정이 창출되는 방식은 좀 복잡해 보인다. 서사의 주된 흐름은 백인 상류층 부인 캐서린 휘태커와 흑인 정원사 레이먼드 디건의 이루어질 수 없는 관계에 대한 것처럼 보인다. 어쨌든 영화의 마지막은 이 두 인물 사이 감정을 깊이 생각하게 만든다. 그런데 이 두 인물의 감정을 사랑으로 말할 수 있을지는 이상하게 망설여진다. 이 영화가 두 인물을 성애적 관계로 묘사하는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흑인 전용 식당에서 두 인물이 함께 춤을 출 때조차 캐시와 레이먼드 사이의 리비도가 드러나는 장면은 이 영화에 허락되지 않는다. 둘이 손잡는 장면도 키스하는 장면도 내 기억에는 없는 것 같다. 캐시와 레이먼드의 관계는 성애적 관계라기보다 차라리 깊은 우정의 관계처럼 보인다. 물론 이혼을 앞둔 캐서린이 레이먼드를 향한 연정을 드러내지만, 영화는 두 인물의 성애적 욕망을 묘사하기를 엄격하게 자제한다. 그것 자체가 금기인 것처럼 회피한다. 이를 상류층 백인과 하층 흑인 사이에 금지된 욕망이라는 시대적 조건을 묘사하는 형식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부족해 보인다. 차라리 이것은 영화가 드러내지 않은 사랑이라는 감정의 공백을 이성애자 관객의 관습화된 욕망이 채우도록 유도하는 기획이라고 보는 편이 타당해 보인다.

영화의 마지막이 캐시와 레이먼드의 이별에서 만들어지는 슬픔을 담담하게 음미하고 있다면 영화의 시작은 캐시의 남편 프랭크의 정체성에 대한 징후적 전개에 할애된다. 프랭크가 홀로 하트퍼드 뒷골목을 방황하다 극장 어둠 속에서 함께 사라지는 두 남자를 쫓아 게이바에 발을 들이는 과정은 영화적 매혹을 흘리며 프랭크의 정체성을 암시한다. 프랭크가 들어간 극장에서 상영되는 영화 <이브의 세 얼굴>이 다중인격장애를 겪는 주인공의 이야기라는 점까지 보태서, 이 어두운 뒷골목의 시퀀스는 프랭크라는 인물 내면을 탐색하는 유려한 형식적 구조를 보여 준다. 이 시퀀스 때문일까. 이 영화를 부부가 각자 다른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로 보기에는 두 사랑에 대한 묘사가 어딘가 불균형해 보인다. 프랭크가 충동에 맞닥뜨리는 순간, 욕망을 탐색하는 시간을 묘사하는 형식의 집중력은 캐시에게 할당되는 절제 또는 생략과 대비된다. 수영장에서 캐시와 프랭크의 병치된 응시만 보더라도 이 영화가 관심을 기울이는 리비도는 프랭크의 것이다. 캐시의 멍한 응시가 먼발치의 젊은 남자를 바라보는 프랭크 시선의 욕망을 대조적으로 증폭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까 이 영화는 인종차별의 장벽 앞에 선 사랑이라는 서사적 외피 아래에서, 프랭크라는 성소수자의 리비도를 드러내는 데 심혈을 기울인다. 이런 방식은 마치 영화가 프랭크의 리비도가 위장하지 않고서는 드러내지 못할 것이라고 암시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이 영화가 진정으로 관심 있는 것은 프랭크의 욕망에 대한 우회적 승인인지도 모른다. 요컨대 내가 이 영화의 멜로적 정서를 다소 혼란스럽게 느낀 것은, 성애적 욕망과 멜로적 감정이 다른 인물로부터 연유하기 때문인 것 같다. 프랭크에게 온전한 멜로의 세계를 제공하는 선택 대신에 이런 혼란을 감수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의문이 든다.

어쩌면 이는 원작의 구조를 해치지 않고 인용하려는 의도가 한몫 하는지도 모른다. 이 영화의 원작이라 할 수 있는 더글라스 서크의 <하늘이 허락한 모든 것>(또는 <순정에 맺은 사랑>)은 남편과 사별한 캐시와 정원사 론 커비의 사랑을 그린다. <파 프롬 헤븐>과 달리 이 영화에서 둘을 가로막는 장벽은 계급 차이뿐이다. 이 영화를 통해 멜로를 작동시키는 넘기 힘든 운명으로서의 금기를 생각해 보게 된다. 멜로의 정서를 창출하는 금기는 느슨한 금기여야 하는 것이 아닐까. 금기에 대한 위반, 좌절할 운명에 맞서고자 하는 욕망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는 그 금기가 지닌 빈틈을 확장할 가능성과 이에 대한 사회적 허용치를 고려할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라는 동일자의 세계에서 누구나 상승의 욕망을 품는 계급 적대의 느슨한 금기가 우리에게 더 많은 시련을 느끼게 만든다. 그런 점에서 계급을 넘어 선 사랑은 대중적 멜로의 주요 주제가 될 만할 것이다.

세간에는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의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를 <하늘이 허락한 모든 것>의 다른 버전으로 언급하기도 한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는 계급적 금기에 나이와 인종의 격차라는 변수를 추가해 재구성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에 성정체성의 변수가 추가된다면 멜로가 선택할 금기의 빈틈은 어디일까. 이에 대한 토드 헤인즈의 답이 <파 프롬 헤븐>인 것처럼 보인다. <파 프롬 헤븐>에는 계급 적대와 인종차별, 성소수자 혐오라는 세 가지 차원의 금기에 대한 멜로 세계의 위계적 양상을 살펴보고자 하는 의지가 분명히 보인다. 그것들이 복합적으로 작동한다면 성정체성의 금기야말로 가장 공고하게 비가시적 영역에 머무를 것이라고 전망하는 것 같다.

<하늘이 허락한 모든 것>이라는 영화가 정체성이 만드는 장벽과 금기에 대한 멜로적 세계의 원형이 되어 <파 프롬 헤븐>에서는 비가시적 성소수자에 대한 고찰로까지 시야가 확장된 셈이다. 토드 헤인즈의 오랜 관심이 정체성에 대한 탐구라고 한다면 고색창연한 영화의 리메이크와 지평의 확장이 이상해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토드 헤인즈는 멜로를 구성하는 원형적 금기로 정체성의 주요 범주가 모두 언급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혔을지도 모른다. 차이를 통해 규정된 정체성의 구획 위에서 위계와 억압이 작동한다는 점에서, 또는 정체성에 기반하지 않고는 우리가 관계 맺을 수 없다는 점에서 정체성은 중요한 화두가 된 지 오래다. 그런 점에서 토드 헤인즈는 동시대적 감독이라고 할 만하다.

정체성 정치에 대해 갈수록 깊은 회의를 느끼는 나는 때로 정체성 자체가 개념이나 구호가 되는 것처럼 보일 때 버거움을 느끼고는 한다.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는 정체성을 파악하는 것 이상의 일일 것이다. 『오인된 정체성』이라는 책에서 정체성은 추상적이고 이를 통한 차별의 양상은 구체적이라는 인상적인 통찰을 본 적이 있다. 세상의 표면만 드러낼 뿐인 영화가 인간의 정체성 이면에 대해 해낼 수 있는 구체적 성찰은 어떤 것일까 하는 의문에서 아직 나는 헤매고 있음을 이 영화를 보면서도 생각하게 된다.

<괴인>

영화 <괴인>의 초반부는 공사 현장을 생활인의 감각으로 묘사한다. 불규칙하게 울리는 타카 소리,계단으로 피아노를 들어올리는 힘겨운 과정, 수고에 대한 답례일지도 모를 피아노 연주를 덤덤하게 응시하는 인부의 얼굴이 생활 세계의 진면목을 보여 주는 것 같다. 그 중에서 기홍이 테이블쏘에 합판을 올리고 무심한 듯, 그러나 완벽하게 능숙하지는 않은 듯 맹렬한 전기톱에 밀어넣는 장면을 지켜보는 것이 나는 쉽지 않았다. 그것은 직업과 생활 세계에 내재한 치명적 위험을 드러내면서 신경을 곤두서게 만든다. 피아노 교습소의 공사 현장을 묘사하는 첫 시퀀스만 본다면 이 영화는 목수와 공사 인부의 노동에 대한 생활 감각적 고찰이라고 해도 될 법하다.

그러나 이후 이 영화는 추측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이 영화는 눈 앞에 펼쳐지는 사태를 인지할 수는 있으나 사태들을 모아 총체적으로 의미화하는 것은 곤란한 부류의 영화인 것처럼 보인다. 보고 난 후 이상하게 이 영화를 다시 돌아보게 된다면, 그건 이게 무슨 이야기인지 정리하기 쉽지 않아서일 것이다. 그런 혼란을 느끼는 것은 이 영화가 자신을 <괴인>이라는 제목으로 명명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제목에 이끌려 누가 ‘괴인’인가 하는 질문을 품고 영화를 보면 처음에는 당연히 목수 기홍이 유력한 용의자가 된다. 기홍은 아무에게나 반말을 일삼고 이상하게 무례한 인물인데, 옥상에서 건넛집 남녀를 훔쳐보는 순간 앞으로 기홍의 기괴한 욕망과 인격을 묘사할 이 영화의 미래를 예감하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후 기홍의 집주인 남편 정환이 기홍의 차 지붕이 찌그러진 사건에 대해 과도한 관심으로 기홍의 세계를 침범하면서, 그 다음에는 보호종료 아동 하나가 그 사건의 범인으로 이들 사이에 등장하면서, 또 그 다음에는 집주인 아내 현정이 술을 들고 남편 몰래 기홍의 방을 찾으면서 ‘괴인’의 용의자는 연쇄적으로 확대된다. 마치 모든 인물이 일견 ‘괴인’의 면모를 지닌 것처럼 전개되는 이 영화는 영화의 제목이 이 영화를 이해하기 위한 열쇠이지 않을까 하는 가정을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못하게 만든다.

각 인물의 이상한 면모를 관통하는 통합적 의미를 만드는 것은 쉽지 않다. 내가 떠올릴 수 있는 것은 이들 인물의 기괴한 면모가 직업 또는 계급적 특징의 한 측면과 관련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뿐이다. 기홍은 목수 반장이라는 직업 세계의 성격을, 정환과 현정은 유한 계급의 권력과 허영을, 하나는 보호종료 아동의 취약함을 어느 정도 반영하고 있지 않은가. 물론 이것은 위험을 내재한 정치적 환유이겠지만 말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이 영화의 제목은 단지 맥거핀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이 영화를 이해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

그러나 이 영화는 각 인물을 정말 ‘괴인’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까지 몰아붙이지는 않는다. 각 인물은 ‘괴인’의 개념에 부합하는 수준까지 가기 전에 멈춘다. 예컨대 기홍은 옆집을 훔쳐 보고 여성에게 아슬아슬한 플러팅을 하기도 하지만 마트에서 임산부에게 계산 순서를 양보하기도 하며, 더욱이 같이 일하던 친구 경준이 고향으로 내려가고 현정의 친구가 의뢰한 인테리어 공사가 기약 없이 미루어지자 초조해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면서 ‘괴인’의 용의선상에서 조금씩 멀어진다. 기홍이 유력한 용의자에서 멀어지는 것은 정환이 등장하면서부터다. 마찬가지로 하나가 등장하면서 정환이 이상한 사람이라는 의심은 하나에게 옮겨 간다. 특히 현정이 기홍과 함께 사라진 다음 날 아침에 벽에 기대 선 채 고개를 떨군 정환은 그저 측은한 인물이 된다.

앞서 이 영화가 계급적 특질에 따른 인간의 괴인적 면모 고찰로 이 영화를 이해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언급했지만, ‘괴인’의 용의선상에서 인물들이 조금씩 이탈하는 방식은 계급적 위상 관계에 따른 개념적, 인과적 이행이라기보다 단지 새로운 다음 인물이 등장하면서 관심 대상이 전환됐기 때문인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 때 ‘괴인’으로 보였던 이전의 인물은 생활 세계 안에서 이해할 수 있을 법한 인물로 달리 바라볼 기회를 얻는다. 다른 인물들이 계급 적대의 환유에서 조금씩 벗어나는 동안 보호종료 아동 하나는 정환의 집에 몸을 의탁하는 데서 끝나는 이 영화는 내게 묘한 미결감을 남긴다.

‘괴인’이 누구인지 한 인물로 확정하지 못하고 다른 인물로 계속 미끄러져 가기만 하는 난감함은 기홍이 정환의 집으로 이사를 가면서부터 시작된다. 그런데 의아한 것은 기홍이 정환의 집으로 이사 가는 공간 전환의 과정이 영화에는 담겨 있지 않다는 점이다. 기홍이 다세대 주택 옥상에서 옆집을 훔쳐보다 핸드폰을 벽 사이로 떨어뜨리고 난 다음 장면에서 고향 친구를 만난 기홍은 이미 이사한 새 집 자랑을 하고 있다. 이 상황을 이해하려면 기홍이 집주인 정환과 첫 대화를 하는 장면까지 기다려야 한다. 국면이 전환되고 본격적인 인물 사이의 미끄러짐이 시작된다는 징표를 영화는 숨기고 싶었던 것일까. 그렇다면 밤길을 지나는 자전거 탄 두 남녀 장면은 반대로 무엇을 위해 공백 같은 표지판을 세우고 있는 것일까. 의미의 단서를 던져 놓고 그것에 머무르는 것에는 저항하는 듯한 모순적 욕망을 추동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 영화는 난감한 면모를 지니고 있다.

<레 미제라블>

이 영화는 파리 외곽의 작은 도시 몽페르메유의 사회적 현실에 대한 르포르타주다. 이 고착화된 슬럼 구역에는 이민자와 빈민이 밀집되어 있다. 유럽과 아프리카가 혼재하고 무슬림과 집시가 드나드는 이 곳은 21세기 비참이 압축된 공간이라 할 만하다. 영화는 이들의 삶을 탐사한다. 영화가 이 지역을 담당하는 강력반 경찰의 행적을 따라 가기는 하지만, 영화의 시선은 그들과 동행하는 기자의 시선에 가깝다. 

경찰은 이 지역의 주민들을 경계하고 적대한다. 범죄와 사건이 끊일 날 없는 몽페르메유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위험 인물이다. 실제로 몽페르메유의 사람들은 위험하다. 누구는 살인을, 누구는 절도를, 누구는 폭행을 저지른다. 이 영화는 결코 몽페르메유 사람들의 선량한 이면을 보여 주지 않는다. 반대로 경찰이 의심하는 대로, 그들 중에서 결국 사건의 범인을 찾아 내 보여 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들에 대한 이해를 단지 잠재적 범죄자와 같은 수준에 머물지 않고 싶어진다. 이것은 어쩌면 하층민과 빈민가의 삶을 다루는 영화에 대해 지니게 되는 오래 된 관습적 반응일지도 모른다. 

이 영화는 몽페르메유의 삶을 다른 수준으로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그 삶의 표면이라는 입장을 취한다. 계급적 세계의 이데올로기를 완전히 걷어낸다는 뜻이 아니라 — 그것은 불가능하다 — 이데올로기의 층위가 옅어지는 순간의 현상의 표면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와다가 이사의 집을 수색할 때 마주치는 아프리카식 계모임이나 공터에서 어울려 노는 아이들의 인류학적 현장뿐만 아니라, 업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간 경찰들의 소진한 모습에서도 그 표면을 만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영화 내내 우리가 지켜보는 표면은 몽페르메유 사람들의 적대감 서린 눈빛이다. 영화의 마지막에 화염병을 들고 경찰을 노려 보는 이사의 눈빛은 순수하게 응축된 적대감 그 자체다. 범죄 사실보다도 이들을 더욱 위험하게 보이게 하는 이 눈빛이 어떤 현상의 표면에 가깝다고 느끼게 만드는 것은 그것이 경찰의 태도에 상응하는 반응이라고 서서히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특정 범죄 혐의와 상관 없이 모든 주민에 대해 경계하고 적대적인 경찰과, 그것을 그대로 되돌려 주는 몽페르메유 사람들을 지켜 본다. 경찰과 주민들의 적대는 서로에게 표면이자 심연이다.

시민을 존중하고 절차를 엄격하게 지키려 하는 경찰 스테판은 <레 미제라블>을 경찰의 폭력에 대한 빈민촌의 저항 같은 장르적 세계로 축소되지 않도록 만드는 인물이다. 동시에 그 역시 대결의 현장에 연루됨으로써 영화 속 적대를 당사자의 차원으로 고정시킬 수 없게 하는 균열 지점이다. 우리는 이를 통해 몽페르메유에서 벌어지는 일의 표면으로부터 그 이상의 것을 떠올릴 수 있다. 영화는 이를 강렬한 사건의 표면에 뛰어들기 전에 이미 암시한 바 있다. 즉, 우리는 그 이상의 것을 프랑스 국기가 휘날리는 월드컵의 열기가 환유하는 국가, 불평등하게 구조화된 체제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에 더해, 중심부 국가 내부에서조차 본원적으로 주변화를 필요로 하는 세계체제 원리의 이데올로기적 시선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몽페르메유의 사람들은 위험할 뿐만 아니라 위험에 포획되어 있는 이들이기도 하다. 그들의 적대적인 눈빛은 세계의 적대에 대한 반응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그들의 눈빛은 세계의 폭력에 대해 나 있는 입구이자 출구다. 이 순환에서 빠져 나오는 방법은 없을까? 이 근원적인 질문에 답할 지혜가 내게는 없다. 다만 <레 미제라블> 안에서 말하자면 스테판이 이사를 겨눈 그 총을 내려 놓는 것만큼 시급한 것은 없어 보인다. 스테판의 총이 이사의 화염병보다 더 파국적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