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 미제라블>

이 영화는 파리 외곽의 작은 도시 몽페르메유의 사회적 현실에 대한 르포르타주다. 이 고착화된 슬럼 구역에는 이민자와 빈민이 밀집되어 있다. 유럽과 아프리카가 혼재하고 무슬림과 집시가 드나드는 이 곳은 21세기 비참이 압축된 공간이라 할 만하다. 영화는 이들의 삶을 탐사한다. 영화가 이 지역을 담당하는 강력반 경찰의 행적을 따라 가기는 하지만, 영화의 시선은 그들과 동행하는 기자의 시선에 가깝다. 

경찰은 이 지역의 주민들을 경계하고 적대한다. 범죄와 사건이 끊일 날 없는 몽페르메유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위험 인물이다. 실제로 몽페르메유의 사람들은 위험하다. 누구는 살인을, 누구는 절도를, 누구는 폭행을 저지른다. 이 영화는 결코 몽페르메유 사람들의 선량한 이면을 보여 주지 않는다. 반대로 경찰이 의심하는 대로, 그들 중에서 결국 사건의 범인을 찾아 내 보여 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들에 대한 이해를 단지 잠재적 범죄자와 같은 수준에 머물지 않고 싶어진다. 이것은 어쩌면 하층민과 빈민가의 삶을 다루는 영화에 대해 지니게 되는 오래 된 관습적 반응일지도 모른다. 

이 영화는 몽페르메유의 삶을 다른 수준으로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그 삶의 표면이라는 입장을 취한다. 계급적 세계의 이데올로기를 완전히 걷어낸다는 뜻이 아니라 — 그것은 불가능하다 — 이데올로기의 층위가 옅어지는 순간의 현상의 표면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와다가 이사의 집을 수색할 때 마주치는 아프리카식 계모임이나 공터에서 어울려 노는 아이들의 인류학적 현장뿐만 아니라, 업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간 경찰들의 소진한 모습에서도 그 표면을 만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영화 내내 우리가 지켜보는 표면은 몽페르메유 사람들의 적대감 서린 눈빛이다. 영화의 마지막에 화염병을 들고 경찰을 노려 보는 이사의 눈빛은 순수하게 응축된 적대감 그 자체다. 범죄 사실보다도 이들을 더욱 위험하게 보이게 하는 이 눈빛이 어떤 현상의 표면에 가깝다고 느끼게 만드는 것은 그것이 경찰의 태도에 상응하는 반응이라고 서서히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특정 범죄 혐의와 상관 없이 모든 주민에 대해 경계하고 적대적인 경찰과, 그것을 그대로 되돌려 주는 몽페르메유 사람들을 지켜 본다. 경찰과 주민들의 적대는 서로에게 표면이자 심연이다.

시민을 존중하고 절차를 엄격하게 지키려 하는 경찰 스테판은 <레 미제라블>을 경찰의 폭력에 대한 빈민촌의 저항 같은 장르적 세계로 축소되지 않도록 만드는 인물이다. 동시에 그 역시 대결의 현장에 연루됨으로써 영화 속 적대를 당사자의 차원으로 고정시킬 수 없게 하는 균열 지점이다. 우리는 이를 통해 몽페르메유에서 벌어지는 일의 표면으로부터 그 이상의 것을 떠올릴 수 있다. 영화는 이를 강렬한 사건의 표면에 뛰어들기 전에 이미 암시한 바 있다. 즉, 우리는 그 이상의 것을 프랑스 국기가 휘날리는 월드컵의 열기가 환유하는 국가, 불평등하게 구조화된 체제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에 더해, 중심부 국가 내부에서조차 본원적으로 주변화를 필요로 하는 세계체제 원리의 이데올로기적 시선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몽페르메유의 사람들은 위험할 뿐만 아니라 위험에 포획되어 있는 이들이기도 하다. 그들의 적대적인 눈빛은 세계의 적대에 대한 반응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그들의 눈빛은 세계의 폭력에 대해 나 있는 입구이자 출구다. 이 순환에서 빠져 나오는 방법은 없을까? 이 근원적인 질문에 답할 지혜가 내게는 없다. 다만 <레 미제라블> 안에서 말하자면 스테판이 이사를 겨눈 그 총을 내려 놓는 것만큼 시급한 것은 없어 보인다. 스테판의 총이 이사의 화염병보다 더 파국적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인 더 하우스>

<인 더 하우스>는 대체로 빛을 과장하지 않는다. 클로드가 라파 가족의 밤을 탐사하는 문제적인 장면에 들어 찬 빛과 어둠의 표현주의적 충동을 제외한다면 이 영화는 빛은 부드럽고 그림자는 옅게 다루는 편이다. 자연광처럼 느껴지는 빛이 여러 각도에서 고르게 인물을 비추어 얼굴의 굴곡이 도드라질 겨를이 없는 야외 낮 장면을 보면 오히려 이 영화의 빛이 심심하게 느껴질 정도다. 그런 와중에 빛과 어둠의 대조가 두드러진 장면이 나오면 이내 그 예외성 때문에 눈여겨 보게 된다.

광원이 화면 안에 놓여 인물과 사물에 깊은 그림자를 만드는 장면이 클로드와 제르망의 관음적 욕망을 드러낸다고 말하는 것은 어쩌면 뻔한 독해일지도 모르지만, 이 영화가 조성해 가는 빛을 다루는 방식의 평균치를 갑자기 벗어나기 때문에 이루어 내는 효과는 크다. 화면 안에 자리한 광원은 시각을 성립시키는 빛의 존재를 뚜렷이 상기시킨다. 감각의 조건으로 머물지 않고 인물, 사물과 함께 화면을 구성하는 존재로 전면 등장할 때 빛은 세계의 이면을 드러내는 영화적 진술이 된다. 라파 부부의 대화를 엿듣다 황급히 돌아선 클로드가 벽에 걸린 파울 클레의 그림을 보는 척하는 장면에서 건너편 벽의 조명 빛이 클로드가 은폐하려는 것을 동시적으로 폭로하고 있는 것처럼, 화면 속 광원은 그 자체로 말하는 제3의 존재다. 제르망 부부가 여전히 클로드의 소설 이야기에 여념이 없는 극장 속에서 영사기 빛이 시각화하는 거대한 열망의 크기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를 보며 빛에 대한 생각을 촉발하는 것은 사실 화면 속 광원보다 극대화된 조도가 만드는 느낌이다. 클로드와 제르망이 클로드의 소설에 대해 논하고 이야기의 방향을 모색하는 교실 장면은 한쪽에 난 창문으로 쏟아지는 빛이 너무나도 밝아 교실 내부를 환히 비춘다. 그 밝기가 야외 낮 장면보다도 밝아 의아할 정도다. 빛이 측면에서 사선으로 들어오는데도 인물의 얼굴 그림자는 부드럽고 빛을 받은 실루엣이 때로는 밝게 번지기도 한다. 반사판으로 그림자를 조절하고 최대의 조도를 실내에 쏟은 이 장면이 교실 내부를 신전과 같이 만들고 있다고 하면 지나친 과장일까. 라파 가족의 일상을 두고 자신의 욕망을 투사해 소설을 만드는 클로드와 그 작업을 지도하는 제르망이 이 순간 어떤 신적 권능을 지닌 것처럼 심취해 있음을 극대화된 조도가 드러내고 있다고 느끼고 나면, 이 영화가 빛을 신전과 현실, 그리고 심연의 세 단계로 나누어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클로드와 제르망의 신적 권능이 현실과 재현의 세계를 뒤섞을 때 벌어지는 참상을 지켜 보면서 영화는 예술의 존재 의미를 냉소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영화가 지닌 다양한 층위의 냉소가 향하는 것은 결국 착취하는 관계에 대한 것이다. 제르망이 아내 쟝과 클로드를 착취하듯이 클로드 역시 제르망과 자기 삶을 착취한다. 이 영화에서 벌어지는 양자적 관계의 군상은 자기 결핍을 다른 것으로부터 보상 받으려 할 뿐 아니라 독점하고 침해하는 양상으로 점철되어 있다. 예술을 본받을 것 하나 없지만 미적 감각은 키워 주는 허영의 도구로 대하는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클로드의 소설 작품 역시 현실에서 인간의 삶을 착취하여 완성된다.

현실을 착취하는 예술의 탐욕을 여실하게 보여 주는 마지막 장면은 그런 점에서 인상적이다. 알프레드 히치콕의 <이창>이나 자크 타티의 <플레이타임>의 한 장면을 연상시키는 이 장면은 카메라의 응시가 관음증적 착취의 시선으로 이행하는 것은 그 렌즈가 누구의 눈으로 기능하는가 하는 문제에 달렸음을 상기시킨다. 이 장면은 이중으로 덧댄 눈에 가까울 것이다. 한 프레임을 가득 채운 아파트의 각 세대를 관음증적으로 바라보는 클로드의 시선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영화 자신의 시선, 그 중층적 시선의 결이 이 장면에 담겨 있다고 할 수 있을테다.

그러나 이에 반하는 예를 들어 볼 수도 있다. 이를테면 클로드가 몰래 집 구석구석을 도둑질 하듯 뒤져 보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숨죽이며 벽에 붙어 섰을 때, 카메라는 클로드가 불가능한 시야까지 움직여 문을 열고 들어오는 에스더를 확인한다. 이 때 카메라는 전적으로 클로드의 확장된 눈이 되어 서스펜스를 만들어 낸다. 서스펜스의 법칙 아래 카메라는 오로지 훔쳐보는 자의 시선만 선택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가 카메라 시선의 지위를 자기 냉소할 수 있는 순간은 오직 사후적으로, 그것도 예외적으로만 가능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 순간을 만나기 위해 이 영화는 위험한 질주를 해 본 것이다. 영화 안에서 신적 권능을 지닌 카메라 시선의 문제는 그 시선의 불가피성을 받아들이는 한에서만 드러날 수 있다.

링크 : 각색된 프랑수아 트뤼포의 ‘영화광 3법칙’ (http://www.newstof.com/news/articleView.html?idxno=10214)

“영화를 두 번 보고, 글을 쓰고, 직접 만든다”는 내용의 ‘시네필 3법칙’을 프랑수아 트뤼포가 직접 말한 적은 없다. 이 ‘3법칙’은 트뤼포의 책 내용 일부가 그의 삶에 대한 해석과 섞이면서 각색된 말이다. 각색의 주인공인 정성일 평론가는 평생 영화에 순정을 바쳐온 시네필로 1995년 영화잡지 <키노>를 창간한 평론가이자 2010년 영화 <카페 느와르>로 입봉한 영화감독이기도 하다. 누구보다도 ‘시네필 3법칙’에 부합하는 인물이다. 그러므로 이 ‘시네필 3법칙’은 프랑수아 트뤼포의 법칙보다 정성일의 법칙으로 헌정되는 쪽이 마땅해 보인다.

출처 : 뉴스톱(http://www.newstof.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