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도 한국 최고의 영화평론가로 불리는 정성일과 허문영의 가장 인상적인 글들이 이 시기에 나왔다고 생각한다(정성일의 <해안선>과 <외출>에 대한 비평, 허문영의 홍상수 비평과 소년성에 대한 글들이 그렇다). 그들은 산업이 사회와 관객의 감각을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알고 있었다. 내가 아는 한, 저널리즘 비평은 이런 조건 속에서 가장 빛난다. 우리가 말하는 ‘비평의 위기’란 어쩌면 산업에서 비평이 멀어져버린 풍경을 가리키는 말일지도 모른다.

오늘날 비평은 서울 중심으로 상영되는 ‘다양한 영화들’을 소개하는 보도자료에 가까운 형식으로 기울어 있다. 지금처럼 많은 영화를 볼 수 있는 환경이 한국영화에 축복이라는 점은 부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 축복은 동시에, 영화가 한때 감당하던 보편성을 내려놓은 결과이기도 하다.

2010년대 페미니즘의 부상 이후, 관객과 독자의 의식은 영화와 문학이 지녔던 진부한 보편성에 대해 일종의 죄책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문학과 영화 전반에서 남성적 주체의 보편성을 거부하는 제스처가 이어졌고, 그 정점이 2022년 <사이트 앤드 사운드> 설문에서 샹탈 아케르만의 <잔느 딜망>이 ‘역대 최고의 영화’로 선정된 사건이었을 것이다. 이 영화의 위대함과는 별개로, 나는 이 선택이 영화사의 기존 정전을 재평가하는 수준을 넘어 영화의 역사 자체를 특수하고 개별적인 분과들의 집합으로 분해하겠다는 정치적 확언에 가까웠다고 본다. 큐레이션이라는 이름 아래 예술사의 남성적 시선을 거부하는 시도들은 그렇게 새로운 정전(혹은 대안적 정전)으로 제안되었다.

이론이 흘러가는 과정 속에서 영화는 점점 신념의 문제가 되었고, 정치적 올바름은 영화 관람의 감각을 제약하는 기준으로 작동했다. 영화에서 진부함이나 보편성을 발견하는 일은 어느 순간 죄악처럼 취급되었다. 이 흐름 속에서 비평의 어휘사전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를 따져보면, 하스미 시케히코를 중심에 놓지 않을 수 없다. 그가 한국 영화광들에게 미친 영향은 사회를 우회하는 방식으로 영화를 읽는 태도와 깊게 맞물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때 ‘주체’나 ‘저항’, ‘돌파’로 불리던 것들은 이제 ‘숏’과 ‘운동’이라는 말로 대체되었다. 그 과정에서 실제 집단으로서의 관객과 사회는 비평에서 점점 지워졌다. 나는 이 흐름이 영화 환경의 ‘미세화’와 맞물려 있다고 본다.

하나의 문화적 주기가 소진된 뒤, 아트하우스 전성기라 불리는 지금의 비평에서 ‘사회’라는 항은 거의 망각되었다고 본다. 정치에서 형식과 매체 연구의 시대로 이행한 이후, 영화비평은 더이상 사회와 길항하는 게임에 들어가지 못한다. 영화는 사회를 향한 질문이 아니라 형식이 얼마나 정교하게 닫혀 있는지를 평가받는 대상으로 읽힌다.

지금 한국 곳곳에서 훌륭한 영화들이 상영되고 있다. 좋은 일이다. 하지만 이 말도 덧붙여야겠다. 훌륭한 영화라는 개념은 어느 정도 과대평가되었다. 이 말은 상업영화를 다시 비평의 중심에 올리자는 제안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시대착오적인 영화를 동시대의 맥락으로 지금의 영화문화에서 상영되는 ‘다양한 영화’들을 보편성의 언어로 다시 말할 수 있어야 한다.

[21세기 영화란 무엇인가?] 트롤링으로서 영화비평 – 비평이 잃어버린 보편성, 과대망상의 필요, gkd, 씨네21

흥미로운 글이다. 다른 생각이 많아진다. 물론 이 글에서 표현하는 보편성이 산업으로서의 영화가 제공하는 자본주의적, 남성중심적 세계관이라는 특수성에 다름 아니라는 것을 유념하면서 읽어야 할 것 같다. 그러나 이에 대한 페미니즘적 비판이 새로운 보편성을 구축해 내지는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 또한 사실이다. 페미니즘적 반성은 아직도 보편과 투쟁 중이고, 내적 분열도 겪고 있으며, 파괴와 대안 실험의 과정 속에 있는 것 같다. 보편성은 우리가 빠져 있는 공통된 착각, 환상이고, 이에 대한 투쟁은 정체성 정치라는 자기 모순을 극복하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이 글은 페미니즘적 문화 반성의 시기가 지난 것처럼 보지만 실은 아직 진행 중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반성의 시간은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일지도 모른다. 이 글이 정확하게 표현하지는 않지만, 공교롭게도 페미니즘적 문화 반성의 시기를 지나면서 영화 비평은 다양한 미세화의 국면으로 빠져든 것처럼 이 글은 진단한다. 그 공교로움이, 소위 보편성, 공통된 착각과 환상이 페미니즘적 해체의 도전에 직면하면서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문화 산업이 새로운 시장을 발견하게 되는 시기적 조우를 가리키는 것은 아닐까. 이를테면 문화 산업이 소품종 대량생산에서 다품종 소량생산의 체제로 이행하는 조건을 문화적 보편성의 위기가 창출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공용어로 소통할 필요가 없는 혼종과 이합집산의 시장은 사회성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일까.

이런 곤경은 영화 비평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고도로 정교해진 체제라는 외재적 유령은 모든 저항을 포섭해 버리고, 각자 자기만의 고유한 경험과 정체성의 미세한 심연으로 파고 들어가는 시대에 담론의 역할은 무기력해 보이기만 한다. 낡은 것은 해체되어 가고 새로운 것은 도래하지 않은 보편성 공백의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어떤 여자들>

두 번째 이야기에서 지나는 캠핑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알버트의 집을 찾는다. 지나는 새로 지을 집에 알버트네 앞뜰에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는 유서 깊은 사암 벽돌을 쓰고 싶어 한다. 그 사암 벽돌을 갖고 가도 괜찮을지 알버트에게 부탁하려는 지나는 알버트의 안부를 물으며 대화를 시작한다. 이 때 지나와 알버트의 대화는 도무지 주제를 파악할 수 없도록 겉돈다. 홀로 사는 노인 알버트는 지난 주에 전화를 받다가 넘어졌고 친구들이 찾아왔는데 넘어진 날에 혼자였는지 사람들과 함께였는지 횡설수설이다. 사암을 주겠다고 직전에 말한 것을 잊었는지 몇 번을 반복하는 알버트와의 이 대화가 영화 <어떤 여자들>의 한 시퀀스를 길게 채운다.

<어떤 여자들>에 담긴 인물들의 말은 지나와 알버트의 대화처럼 일말의 명확한 정보와 대다수의 파악 불가능한 문장들로 이루어져 있다. 첫 번째 이야기에서 로라가 읽는 의뢰인의 사건 관련 서신 역시 마찬가지다. 몇 분에 걸쳐 서신 내용을 전해 들어도 우리는 로라를 집요하게 찾는 의뢰인이 처한 피해 사건의 내용과 법리적 곤경을 온전히 파악할 수 없다. 세 번째 이야기에서 목축업자 여인은 과묵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그의 과묵함이 파악 불가능한 말이 일으키는 혼란을 줄여주는 덕분에, 역설적이게도 서사의 흐름을 더 잘 파악할 수 있게 해 준다. 목축업자 여인은 엘리자베스를 만나고 헤어지고 다시 만난 후 헤어진다.

이 영화를 서사와 메시지로 파악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이 영화에서 인간의 언어는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서사를 온전히 만들어 내지는 못한다. 과장하자면 영화 곳곳에 삽입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그것처럼, 귀기울일 것 없이 지나치듯 들리는 사람의 목소리, 음성과도 같다.

이 영화에서 인상적인 시퀀스는 앞서 말한 지나와 알버트의 대화 장면이다. 여기서 횡설수설하던 알버트는 집 앞 거친 초원에서 들리는 메추리 소리를 흉내 내며 마치 “How are you?”와 같이 들린다고 말한다. 지나는 알버트가 흉내 내는 다른 메추리 소리에 이내 “I’m just fine”이라고 응답한다.어쩌면 이 때가 지나와 알버트가 온전하게 대화하고 있는 유일한 순간인 것처럼 느껴진다. 지나가 자신의 목적을 숨기고 의례적으로 건넨 첫 인사에서는 실패한 알버트의 안부가 메추리의 소리를 통해 응답한다. “How are you?”와 “I’m just fine”은 이 영화의 다른 언어와 달리 감정과 서사를 품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희박한 주체의 감정과 서사의 여백을 자연과 사물에 대한 감각이 채운다. 누군가는 이것이야말로 서부 영화 전통을 떠올리게 하는 대지의 물성이라고 말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미국 북서부 몬태나주 소도시와 외곽 자연의 겨울에 대한 감각을 불러 일으키는 빛과 공기와 소리가 이 영화에 가득하다. 그런데 이 영화의 물질적 감각이 이끄는 느낌은 여러 층위가 혼재되어 있는 것 같다. 앞서 말한 메추리의 소리처럼 느슨하게 인물의 감정과 서사를 대리하기도 하고, 때로는 타자와 주체의 구분을 뒤섞고 혼동시키기도 한다. 소파에 누워 티비를 보고 있는 로라 옆에서 들리는 그렁그렁 코 고는 소리가 뒤늦게 로라의 반려견이 내는 소리라는 것을 깨닫게 될 때에는 소리에 대한 감각이 우리의 인식을 교란하는 지표가 된다. 또는 로라가 들른 쇼핑몰에서 인디언 복장을 한 사람들을 카메라가 오랫동안 지켜 볼 때에는 미국의 역사적 타자가 상기되기도 한다. 그리고 물론 목축업자 여인이 말을 끌고 목장을 나설 때면 공간을 둘러싸고 있는 눈 덮인 거대한 산맥이 물자체적 물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 영화에서 물적 감각은 의미를 무화하기도 하고 대리하기도 하며, 대체하기도 한다. 감각적 정보가 지닌 이런 복잡한 면모를 특정한 의미망으로 수렴시킬 방법을 찾는 것은 쉽지 않다. 다만 보탤 수 있는 말은 리빙스턴 시내의 로라, 도시 외곽 캠핑 지역의 지나, 그리고 벨프리라는 시골 마을 목축업자 여인이 그들을 둘러싼 다양한 양태의 타자성을 경험하는 동안 우리는 낮은 밀도의 정서 안에서, 그 경험을 스치듯 감각해 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게 본다면 영화 안에서 세 여성 인물이 남성, 여성 타인과 관계 맺는 양상에 대한 페미니즘적 가능성도 포괄해 생각해 볼 여지를 만들 수 있을지 모른다. 그래도 한 가지 의문은 해소되지 않는다. 이 영화는 왜 세 인물을 각자의 지평에 따로 존재하게 두지 않고 굳이 연결점을 만들려 하는 걸까. 로라의 내연남이 지나의 남편 라이언이라는 것, 목축업자 여인이 리빙스턴 시내 법률 사무소에서 기어코 로라를 지나치듯 만난다는 것이 이 황량한 여백의 세계를 사는 세 여인에 대한 감각을 운명적으로 묶고 싶게 만든다. 내가 감각한 것은 그들의 운명일까 그것을 덮고 있는 무심한 물리적 세계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