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랙 베이: 바닷가 마을의 비밀>

프랑스의 어느 아름다운 해안 마을에 부유한 페테겜 가문 가족이 여행을 온다. 별장에서 한가롭게 휴가를 즐기기에 이 마을은 기괴한 위험을 품고 있다. 이 마을을 찾는 관광객이 연달아 실종되는 사건이 벌어지는 동안 <슬랙 베이>는 이 실종 사건의 장본인인 브뤼포르 가족과 여행 온 페테겜 가족, 그리고 사건을 수사하는 형사 마샹, 말푸아를 지켜 본다.

이 영화에서 사건과 인물의 본질을 가늠하기는 쉽지 않다. 중심 사건이라 할 수 있는 의문의 실종 사건은 범죄 현장 바로 앞에서도 진상이 밝혀지지 않고 소동으로 끝난다. 심지어 이 마을 사람들은 브뤼포르 가족이 저지르는 일을 잘 알고 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바다에서 죽은 사람을 숱하게 건진 구세주라고 추켜 세운다. (때로는 영화가 브뤼포르 부자를 성자의 모습으로 묘사하기까지 한다.) ‘나의 아가씨’라는 뜻의 속어인 마 루트(ma loute)를 이름으로 쓰는 브뤼포르 집안의 첫째 아들이나 성정체성을 오가는 페테겜 집안의 빌리, 사촌이자 동시에 부부인 페테겜 가족의 이력 등 인물들은 우리가 쉽게 추정하는 본질로부터 어긋나 있다. 이 영화는 목가적 마을과 그 곳에서 벌어지는 이상한 사건이 일으키는 강렬한 대비의 느낌 그 이상, 무엇이 본질인지 파악하려 할수록 미궁에 빠지는 세계를 지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계급적 적대를 은유하며 사회적 지배 계급과 제도에 대해 조롱의 유머를 꾀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히 알 수 있다. 잘 차려입은 여행객들에게 음험한 눈빛을 보이는 브뤼포르 부자와 페테겜 가족으로부터 매번 꾸중 듣는 가사 도우미 나데쥬로부터 분노를 삼키는 노동자의 삶을 상기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리고 몸이 굽어 이상한 몸짓을 하는 페테겜 가족의 가장 앙드레나 수사가 미궁에 빠질수록 몸이 부풀어 거동조차 어려운 형사 마샹, 어딘가 어리숙하게 말하는 신부에 이르기까지 이 영화에서 웃음을 유발하는 이들이 자본, 국가, 종교, 그리고 가부장 제도에서 상층부에 자리하고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그들은 그들이 처한 자리의 힘을 지니고 있지만 실질로서는 무능한데, 이를 영화는 희화화된 신체적 특질로 표현한다.

 브뤼포르와 실종 사건, 페테겜 가족의 여행과 가족사, 마샹과 말푸아의 엉터리 수사, 그리고 마 루트와 빌리의 짧은 사랑과 혐오가 느슨한 매듭으로 배치된 이 영화는 어쩌면 여러 파편으로 이루어진 농담 덩어리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악의적인 비하 또는 조롱이나 윤리적 시험의 경계에 걸쳐 있어 그 자체로 즐길 수 없는 농담이다. 각종 신체적 비하뿐만 아니라 이를테면 고기를 낚던 브뤼포르가 때로는 여행객을 해치고 인육을 먹는 범죄자가 되었다는 것이나, 빌리가 오드 페테겜이 아버지 또는 남동생으로부터 근친 강간을 당하여 낳은 아이라는 사실을 과장된 연기와 농담 같은 이야기 전개로 희석하여 웃으며 넘기기는 힘들다. 마 루트가 빌리를 잔인하게 폭행하는 동안 종교적으로 웅장한 음악이 들릴 때에는 이 악의적 장난에 오히려 웃음기가 사라질 정도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를 보고 나서 기억해야 할 한 가지는 영화 속에 맥락 없이 던져 놓은 크리스티앙의 외마디 외침이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만, 우리는 그것을 하지 않는다(We know what to do, but we do not do.).” 이 영화는 자신이 일으키는 효과와 이에 대해 관객이 무심코 가지게 될 태도에 대해 미리 지적해 놓은 것이다. 우리는 웃어야 할 순간임을 알지만 웃지 않는다.

크리스티앙의 일갈은 (영화적 표현 양식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우리를 호명하는 자리에 우리가 응하지 않는 영화적 효과를 뜻하는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이 말은 반대로 이데올로기적 호명에 사로잡혀 명료한 진리, 유일한 실천을 고집스럽게 거부하는 상태를 가리키기도 한다. 그리고 이 크리스티앙의 말로부터 유사한 구조를 지닌 문장으로 생각을 이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페테겜의 남자들은 죄값을 치러야 할 것을 알지만 그들은 그리 하지 않는다. 우리는 무엇이 옳은 일인지 알지만 결코 그것을 실천하지 않는다. 우리는 무엇이 진리인지 알지만 진짜로 그것을 알지는 않는다…….

<마녀 배달부 키키>

1. 내가 키키를 처음 만난 건 대학 신입생 때였다. 제목만 들어 온 <마녀 배달부 키키> 비디오 테입을 학교 어학실에서 발견했을 때 나는 침묵이 흐르는 어학실 안에서 흥분한 입을 애써 막아야 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을 드디어 보는구나. 하지만 들뜬 마음은 오래 가지 못했다. 내가 발견한 그 테입은 한국어 더빙도 자막도 없는 일본판이었다. 그 때는 일본 문화 개방이 이루어지기 전이었기 때문에 이 애니메이션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귀한 일이었다. 그렇게 나는 드문 경험을 했을테지만 그림만으로는 이야기를 모두 이해하기 어려웠고, 한동안 키키는 내게 미지의 사연을 간직한 아이로 남았다. 개인사를 끄집어 낸 것은 키키와의 완벽한 첫만남이 무산된 것이 여전히 아쉽기 때문이다. 그 때 키키의 이야기를 온전히 만날 수 있었다면 나는 키키의 마음을 어떻게 이해했을까. 부모의 품을 떠나 낯선 서울에 홀로 던져진 스무 살의 내가 달리 구하지 못했던 위로와 용기를 여기서 얻지는 않았을까.

2. 열 세 살에 독립해 낯선 바닷마을 도시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아 고군분투하는 키키를 나는 이제 그저 흐뭇한 마음으로 지켜볼 수 있을까. 분명한 것은 지금의 나도 여전히 키키처럼 타인을 만나 관계를 만들고 세상에서 내가 해 낼 몫을 찾는 데 노심초사하는 경험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이다. 상처 받거나 낙담하고 두려움에 휩싸여도 삶은 이 과정을 매번 되풀이한다. 새로운 세상에 대한 기대에 부풀었던 키키가 바닷마을에 도착하고 이내 얼굴이 어두워지는 것을 보노라면 그 감정이 또렷하게 와 닿아서, 그런 마음의 움직임은 예감할 수는 있지만 여전히 내가 익숙해지지 못한 문제라는 생각에 빠진다.

3. 내가 키키의 낙담에 공감하게 되는 것은 그것이 마음 먹기에 달린 문제가 아니라 존재 자체에 새겨진 것으로부터 발현되는 불가피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키키가 노부인의 의뢰로 그의 손녀에게 청어 파이를 배달하면서 직감적으로 갖게 되는 손녀에 대한 적대감은 손녀의 불친절에 대한 것일 뿐만 아니라 계급적 괴리에서 연유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키키는 타인과 세상에 대해 적대하며 존재할 수 없다. 키키의 마법 능력은 선의를 잃는 순간 상실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키키가 자기 존재의 본질을 세상에 도움이 되는 마녀로 규정하는 한 그는 적대를 마주하고서도 삶을 의지로 낙관하고야 말 것이다.

4.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에서 비행의 쾌감은 중요하다. 그의 작품이 원초적이고 불가능한 환상을 긍정한다고 볼 수 있는 징표가 비행 장면에 새겨져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그림에서 나는 것의 쾌감과 실감은 바람으로부터 일어난다. 찰랑이는 머릿결과 옷깃이 창공을 날면서 부딪치는 공기 저항의 촉각을 시각화한다. 모든 프레임을 손으로 하나 하나 그려 내야 하는 고된 셀 애니메이션 작업에서도 미야자키 하야오가 시종일관 생략하지 않고 공 들여 묘사하기를 고집하는 것은 인물을 감싸고 도는 공기, 바람이다. 필모그래피에 ‘바람’이 들어가는 제목이 두 작품 있을 정도로 하야오는 바람을 사랑한다. 바닷마을의 계단 꼭대기 또는 수풀 우거진 언덕 위에서 하늘거리는 키키의 단발 머리로부터 바람을 생경하게 감각하다 보면 미야자키 하야오가 세계를 낙관하는 근거는 우리가 여전히 숨쉬고 있다는 것 자체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든다. 그러고 나면 세상에서 선의는 드물고 항구적이지 않다고 여기게 된 내가 사실은 세계를 감각하는 능력을 점점 잃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묻게 된다.

<레이닝 스톤>

밥은 어린 딸 콜린의 첫 성찬식 드레스 만큼은 빌려 입히고 싶지 않았다. 밥은 다가오는 성찬식이 콜린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날이라고 생각한다. 콜린이 어떻게 여기든 밥의 마음은 그렇다. 그 날 콜린은 밥의 마음에 흡족한 새 드레스를 입고 제단에 올라야 한다. 실은 새 드레스와 구두를 살 100파운드 남짓이 밥에게는 없다. 요금을 내지 못해 전화도 끊길 만큼 형편이 어려운 밥은 지금 실직자다. 그런 밥에게 콜린에게 입힐 새 드레스는 사치스러워서 허영에 가깝다. 그래도 밥은 무슨 일이 있어도 새 드레스를 살 돈을 만들겠다고 고집한다.

<레이닝 스톤>을 움직이는 감정적 힘은 밥의 고집이다. 나는 신념이 아니라 고집이라고 말하고 싶다. 밥은 가부장의 얼굴을 하고 종교 의식에 과도하게 의미를 부여한다. 성찬식의 새 드레스는 딸 콜린이나 아내 앤이 아니라 밥의 의지다. 밥은 이를 관철하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할 기세다. 그 고집이 자신과 가족에게 닥친 빈곤의 고난을 가중시킨다고 해도 말이다. 이를 타당하게 설명할 이론이 밥에게는 없다. 차라리 밥은 가부장의 권위와 종교적 의지라는 텅 빈 고집을 밀어붙이면서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고 말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 영화를 종교적 신념과 가족의 생계를 모두 책임 지려는 아버지의 안타까운 고군분투로 정리하고 싶은 유혹에 대해 스스로 이렇게 반문한다. 밥은 왜 콜린의 성찬식 새 드레스를 고집하는가. 그는 무엇에 대항하여 그것을 고집하는가. 콜린의 새 드레스가 고집해야 할 대상이 되는 이유는 그가 가난한 실업자이기 때문이다.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중산층이었으면 아무 일도 아니었을 드레스 한 벌을 두고 밥은 자신의 가난과 싸우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가부장제와 종교라는 밥의 이데올로기적 고집이 빈곤 앞에서 세상과 불화하는 방식을 드러낸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돌이켜 보면 이 영화에서는 빈곤으로 인해 이데올로기적 도덕률과 불화하는 다양한 양태를 지켜볼 수 있다. 밥과 이웃집 친구 토미는 방목하는 양과 보수당 당사 앞 잔디를 훔치며, 토미의 딸 트레이시는 마약을 팔아 돈을 번다. 그들은 돈을 구할 수 있다면 닥치는 대로 무엇이든 할 것이다. 건너 집 가난한 30대 여성은 절도 행위로 검거된 후 세 아이를 두고 목숨을 끊는다. 밥은 사채업자의 협박에 저항하다 살인 사건에 휘말리며, 밥을 도우려는 신부는 그가 사채업자의 사망 현장에 있었다는 사실을 숨기려 한다. 이처럼 이데올로기적으로 논쟁적인 상황은 시종일관 빈곤을 향하고 있다. 즉 가난한 이들에게 빈곤은 도덕에 선행하는 문제라는 것이다. 빈곤은 이데올로기의 텅 빈 실체를 드러낼 뿐이며, 노동은 신성하다는 좌파적 이데올로기도 무의미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딸 트레이시가 쥐어 준 용돈을 손에 구겨 넣고 혼자 서럽게 흐느끼는 토미에게 나는 가부장제적 맥락에서 아버지에 대한 동정심을 가지지 않을 도리가 없다. 성찬식에서 밥의 비밀을 숨긴 신부가 밥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하는 빵 조각을 건네는 장면에서는 가련한 밥을 종교적 맥락 안에서 안타까워 하는 감정을 키우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이 영화가 이데올로기적 현실과 일으키는 긴장은 빈곤에 처한 삶의 실체를 총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이데올로기적 맥락을 경유하려는 태도에서 발생한다. 모순은 중층 결정된다는 오래된 정식을 영화적으로 실천하려는 것처럼.

사채업자가 예고 없이 밥과 앤의 집에 들이닥쳐 빚을 갚으라고 협박하는 장면에서 콜린의 눈빛을 나는 잊을 수 없다. 사채업자가 테이블을 쓸어 버리며 앤을 윽박지르는 동안 이를 지켜보는 딸 콜린의 얼굴은 무표정하다. 그것은 상상할 법한 것이라기보다 현실에서 있을 법한 얼굴이다. 이 자본주의적 트라우마를 담을 감정이 아직 콜린에게는 없다. 두려움에 떨거나 폭력에 분노하는 것은 오히려 어른의 몫이다. 그 순간 콜린은 빈곤이 야기하는 사회적 효과가 어떤 것인지를 텅 빈 감정으로 관찰한다. 황급히 돌아온 아빠 밥에게 사채업자가 엄마의 결혼 반지를 빼앗아 갔다고 전하는 콜린의 목소리는 침착하다. 이처럼 담담한 콜린이 나를 불안하게 만든다. 이 텅 빈 목격자에게 세계의 진실이 폭로되는 것만 같기 때문이다. 이제 콜린에게 세계의 진면목은 예수의 피를 상징하는 포도주가 아니라 앤이 살피는 신문 모퉁이의 구인 광고나 밥이 사채업자에게 진 빚에 존재하게 될 것이다.

<레이닝 스톤>은 밥과 토미, 그리고 그들의 가족을 구원할 수 없다. 성찬식이 끝난 후로도 그들 앞에는 새로운 고난이 기다릴 것이다. 이 영화가 제시하는 실직 노동자가 처한 빈곤의 비참은 밥의 장인이 전하는 구호 이상의 문제이며, 밥의 비참이 긴급한 데 비해 세계는 강고하게 모순적이다.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이런 세상을 이대로 두면 안 된다는 마음이 생긴다면 바로 그것이 이 영화가 해 내는 성취일 것이다. 차를 잃고 난망해 하는 밥과 토미를 진심으로 걱정하며 함께 거리를 서성이는 펍의 이웃 같은 마음이 우리 모두에게 일어날 수 있다고 믿는 것, 그것이 이 영화가 세계에 표방하는 유일한 낙관일 것이다.

영화와 예술이 인간 세계를 향해 말을 거는 매혹적인 타자라고 할 때 우리는 흔히 그 매혹성에 집중하게 된다. 분명 어떤 작품은 발굴해야 할 미지의 비밀을 간직한 것처럼 나타나 자신의 존재를 세계에 알린다. 그러나 <레이닝 스톤>을 비롯한 켄 로치의 영화들은 그런 태도와 거리가 멀다. 숏과 숏 사이의 비밀을 파헤치는 것이 그의 작품에 대해 생각하는 작업으로는 언제나 부족한 시도로 보인다. 그의 영화는 오히려 미적 존재감을 표출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처럼 보인다. 대신 작품이 애쓰는 것은 지금 이 세계에 필요한 말을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인간 세계의 구체적 삶을 이해하고 구하기 위해 필요한 말을 꺼내고 있는가에 관심을 쏟는다는 점에서 켄 로치의 영화는 존재의 고유성을 다루는 예술의 세계에서 별나게 고유한 존재다. 켄 로치에게 영화적 순간은 미학적 고유성을 증명하는 순간이라기보다 사회적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오해가 없도록 덧붙인다면 절제된 미학이 사회적 진실과 만나고 있음을 깨닫는 순간이다. <레이닝 스톤>에서 콜린의 눈빛이 실업과 빈곤이 야기하는 메마른 상처의 실체를 드러내듯이 말이다. 그것이 놀랍고 존경스럽다고 지금껏 생각해 왔다. <레이닝 스톤>을 만난 이후부터 나는 줄곧 그런 마음을 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