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r for a Korean film featuring two people standing in a desert under a large tree, with bold yellow title text and Korean captions across the image and a blue sky backdrop.

<3개의 얼굴들>

자파르 파나히의 영화는 유독 자동차 안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다. 적어도 내가 본 영화들은 그렇다. 이것은 파나히 영화의 제작 조건이 만든 불가피한 선택일 것이다. 이란 정부로부터 반체제 인사로 낙인 찍히고 출국도 영화 제작도 금지 당한 파나히의 꾸준한 영화 작업은 그 자체로 저항의 의미를 지닌다. 수많은 스탭의 공동 작업인 영화 만들기가 억압 당할 때, 이동과 촬영의 자유가 자동차 안에서 구현된다고 우리는 상상할 수 있다. 인물들이 생각에 잠기고 슬퍼하고 걱정하며 대화하는 사이에 자동차는 어딘가로 이동하며 말 그대로 운동성을 영화에 부여한다. 스튜디오의 영화가 자동차의 실내와 외부를 분리하고 온전한 촬영 환경을 만들기 위해 온갖 기계 장치를 이용하는 동안 파나히의 자동차는 협소하고 내밀한 촬영장 자체가 된다.

파나히의 영화에 나오는 자동차 씬을 볼 때마다 나는 고정된 카메라가 지켜보는 단조로운 인물의 얼굴보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공간의 변화를 계속 관찰한다.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서가 아니라 그 장면의 지루함을 보상하는 유일한 운동성이 자동차 바깥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이동뿐이기 때문이다. <3개의 얼굴들>에서 마르지예를 걱정하며 밤길을 운전해 시골 마을로 가는 자파르 파나히와 베흐나즈 자파리가 전화를 받고 고속도로를 벗어나 한적한 곳에 차를 세우고 통화를 하는 긴 시퀀스는 공간의 변화와 운동성을 자동차가 만드는 좋은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장거리 운전을 하다가 차를 세우고 문을 열고 나와 바깥 공기와 소리를 맞을 때 환기되는 느낌을 이 시퀀스에서 그대로 느낄 수 있다.

좁은 차 안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파나히 영화의 경험은 정적이면서 동시에 동적이고 폐쇄적이지만 동시에 누군가를 향해 가는 개방성을 보인다. 파나히는 자동차에서 자유를 느끼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다면 셰자드의 집 앞에서 세 여인의 밤을 지키기 위해 파나히 홀로 자동차 안에서 잠을 청하는 장면이 피로를 넘어선 평화로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그보다 그 장면의 시간을 그렇게 환상적으로 표현하지 않았을 것이다. 운전석 차창 위치에서 오솔길을 향하는 긴 응시에, 셰자드의 집과 자파리의 걸음 위로, 어스름한 초저녁에서 칠흑 같은 밤으로 빛의 변화가 담긴다. 이 긴 응시는 자동차와 파나히, 그리고 영화가 함께 수행하는 응시다. 때로는 영화에서 파나히가 곧 자동차이며 자동차가 곧 파나히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는데, 이 응시야말로 파나히와 자동차의 일체성을 보여 준다.

더불어 이 장면에서 벌어지는 빛과 시간의 변화는 이란에서 여성 배우의 삶을 슬픈 기운으로 은유하는 것 같다는 감흥에 빠지기도 한다. 배우가 되기를 바라지만 금지 당하는 마르지예, 현역 배우로 고군분투하는 자파리, 이슬람 혁명 후 은퇴 당해 시골 마을에서 쓸쓸히 살고 있는 셰자드라는 세 인물을 하나의 삶의 궤적으로 포개어 상상하고 싶은 욕망을 이 저녁의 환상은 불러 일으킨다. 그러면서 이 영화가 지칭하는 세 얼굴 중 하나는 자파르 파나히가 아니라 짙은 어둠 속에 칩거하고 있는, 얼굴 없는 셰자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2025년 8월에 세상을 떠난, 세헤라자데라는 가명의 코브라 아민 사이디(کبری امین‌سعیدی, Kobra Amin Saeedi, 1950년 12월 9일~2025년 8월 18일)라는 배우를 나는 찾아봤다. 아마도 그가 이 영화의 셰자드가 아닐까 추측한다. 그러나 1979년 이슬람 혁명 후 스크린에서 얼굴을 잃은 수많은 셰자드가 있을 것이다. 영화는 셰자드의 이야기만 재현하고 그 얼굴을 직접 재현하지 않음으로써 모든 셰자드를 드러낸다.

파나히의 자동차가 수행하는 여정에는 민속지적 관찰이 따라 붙는다. 길에서 마을에서, 파나히는 이란 시골 마을의 문화와 관습을 다층적으로 묘사한다. 파나히에게 이야기를 추동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라고 할 법한 이슬람적 억압 체계일 것이나, 동시에 척박한 조건에서도 손님을 환대하는 문화적 전통이 드러나는 순간도 무시할 수 없다. 나는 파나히가 시골 마을을 찾을 때면 언제나 이 환대와 억압의 양가성 사이에서 갈등하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집까지 모시고 와 할례를 치른 아들의 성기 피부를 테헤란의 대학교에 묻어 달라 하는 어느 남자의 부탁을 자파리가 거절하지 못하는 것처럼, 환대와 억압은 동시적이고 분리해 대하기 어려운 문제임이 이 갈등적 묘사에 담겨 있다.

<3개의 얼굴들>에서 파나히는 이 양가적 갈등에서 어떤 결단을 내리지 못한다. 카메라와 전경 사이 또 한 겹의 필터가 된 파나히의 자동차 앞유리는 구석이 깨져 있다. 마르지예의 오빠가 깨 버린 것이 분명하다. 환대와 억압 사이의 긴장을 파나히 일행은 끝내 돌파하지 못했음을 돌아가는 차의 깨진 유리가 암시하고 있다. 자파리는 파나히에게 차에서 내려 걷겠다고 한다. 그 때 마르지예는 자기 스스로를 구하고야 만다. 자동차의 시선 뒤에서 달려온 마르지예는 파나히-자동차를 지나쳐 고갯길 멀리 떨어진 자파리에게 향한다. 어떤 사건은 비가역적 변화를 내포한다. 지금 미국이 저지른 전쟁이 세계의 안정적 질서라는 환상에 돌이킬 수 없는 균열을 낸 것처럼 말이다. 달려가는 마르지예와 뒤돌아 기다리는 자파리는 그런 사건 속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고갯길 반대편에서 수소와 교배할 암소 떼를 실은 트럭이 넘어온다. 자파리와 마르지예는 트럭 행렬을 거슬러 함께 두 발로 고갯길을 넘는다. 그리고 깨진 유리의 얼룩으로 스크린에 끼어들고 있는 파나히-자동차는 그저 이 장면을 응시할 뿐이다. 그 세세한 영화적 선택 모두가 나는 겸허하고 진실되다고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