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주세페 토르나토레

출연 : 주세페 술파로, 모니카 벨루치

모니카 벨루치는 분명 매혹적이다. 그녀가 나를 응시하지 않는다 해도 나는 그녀의 눈에 빠져들어버린다. 내면의 아름다움을 가릴 겨를 없이 그 외모에 눈이 멀어 버린다. 인간이기에 알아볼 인간 신체의 아름다움을 그녀는 고이 간직하고 있다. 그것은 그녀가 타고난 운명일지니.

영화 속 말레나도 마찬가지다. 외모 자체로 그녀는 욕망의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 났다 – 벨루치도 원하든 원하지 않든 자본주의가 생산해내는 욕망과 이윤의 놀이 속에 내던져져 있다. – 시실리 마을의 모든 남자들을 매혹시키는 미모는 마을 남자들에게도, 그들의 아내들에게도 진정한 사랑을 받지 못하도록 만든다. 2차대전의 비참이 마을을 휩싸는 가운데 놓여진 말레나는 마을 사람들에 의해 이중의 비참을 맛본다.

영화는 내내 말레나를 훔쳐보게 한다. 그녀의 다리, 가슴, 엉덩이, 얼굴을 쉬지 않고 훑으며 욕망을 부추긴다. 영화를 보는 동안 우리는 시실리 마을의 남정네들과, 또는 그들의 아내들과 비슷한 욕구와 시기를 느낀다. 어쩔 수 없다. 그녀는 그녀 안으로 뛰어들 필요도 없이 겉모습만만으로 욕망을 일으키므로.

그러나 그들의, 우리의 욕망은 일그러진 욕망이다. 내 정신이 어떻게 할 수 없도록 솟구치는 물질적 반응까지 어떻게 할 수는 없겠지만 그들과 우리는 그 욕망을 소유하거나 배제하는 방식으로 충족시키려 한다. 표면적으로 볼 때 그렇게 해서 우리의 욕망은 채워질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이 욕망은 내가 느끼는 것만큼 다른 사람들도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내 욕망은, 실은 다른 사람의 욕망이며 그것의 반영일 뿐이다. 이 욕망의 복제품들은 쉬지 않고 서로를 헐뜯고 싸우도록 만든다. 그러다 지치면, 또는 그 이전에 그것의 위험성을 느낄 때 우리의 해결 방식은 욕망의 대상을 제물로 바쳐 버리는 것 뿐이다. 철학 강의 시간에 들은 바가 있어 하는 얘기지만, 이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원시부족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희생양 제도나 시실리 마을 사람들의 말레나에 대한 폭력이나 다를 바가 없다. 그들은 아주 단순하게 욕망하고 그 욕망의 충족이 쉽고 단순하게 성취될 수 없을 때 욕망의 대상을 제거해 버리는 것으로 해결해 버린다. 이 얼마나 어이없는 일이며 얼마나 슬픈 운명들인가.

그러나 이 영화에서 말하려는 것은 조금 다른 차원에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말레나에게 지니는 욕망은 단지 그녀를 나의 것으로,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의 육체를 내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욕망이다. – 그것이 남자의 욕구든 여자의 시기든 – 그것은 말레나가 나를 욕망하는 것은 안중에도 없이 철저히 우리의 입장에서 행해지고 충족시키는 방식을 취한다. 그리고 그것으로 우리는 그녀가 완전히 내 것이 되었다고, 나와 동화되었다고 믿는다. – 우리는 은연중에 타자와 동화되려는, 나와 다른 존재와의 근원적 단절감을 해소하고자 하는 욕구를 지니고 있다 – 우리의 욕망이 충족되는 것은 이러한 방식을 통해서이다. 과연 우리는 말레나를 소유할 수 있을 것인가. 설령 말레나와 섹스를 함으로써 정복을 과시하며, 말레나를 쥐어뜯고 깔아뭉개며 머리카락을 뽑아 내고는 승리감에 도취한다 하여도 그것은 우리의 욕망을 실현해 낸 것일까.

그래서 중요해지는 것은 욕망의 충족 방식 또는 욕망 자체의 방식이 된다. 타자를 – 즉 말레나를 – 우리의 (욕망의) 자리에다 앉힘으로써 그녀가 내 자리에 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가능해지는 것은 내가 그녀의 자리에 가 앉기 위한 노력에 있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나의 욕망을 부정해야 하며 내 욕망을 부정하기 위해서는 내 욕망을 의식해야 한다. 자연스러울지도 모르는 욕망의 솟구침과 충돌하는 의지와 노력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또는 우리의 욕망의 방식은 여전히 범접할 수 없는 타자로서의 말레나를 몰래 훔쳐보다가 언젠가 기회를 포착하여 그녀를 포획하여 삶아먹을 생각만 하고 있다. 우리의 욕망은 일그러져 있으며 그 일그러진 욕망을 표상하는 것이 2차 대전이라는 시대적 상황이다. 자본주의가, 타자를 나의 모습과 동일하게 만들도록 폭압적 교정을 하고 인간과 정신과 온갖 타자들을 돈이라는 물질적 척도로 환원시켜 그것으로 소유 아닌 허위 소유를 가르치고 부추기며 부르주아의 욕망을 관철시키기 위해 프롤레타리아를 착취하며 생존을 위해 타자를 짓누를 수밖에 없게 하는 자본주의가 결과하는 추악한 본성의 극적인 공연. 무솔리니와 히틀러의 잔혹한 파시즘.

사춘기 소년 레나토는 시실리 마을 어른들의 욕망이 일궈내는 한 여인의 비극을 지켜본다. 그의 시선은 관음증적이지만 심하게 일그러져 있지는 않다. 그는 말레나를 사랑하지만 쉽게 접근하지 못한다. 그가 사랑하는 방식은 시실리 사람들의 방식과는 다르다. 그는 말레나를 자신의 자리에 두려 하지 않고 자신이 그녀의 자리에 가 닿으려 한다. 마음에 드는 성자상(이게 맞는 용어인지)에 가 그녀의 행복을 기원하지만 ‘나에게 오면 잘 해 주지’라는 식으로 그녀를 동화시키려 하지 않는 것이다. 일면 두려운 타자이기도 한 말레나에게 레나토는 애틋하고 수줍게 다가선다. 말레나에 대한 사랑은 판타지로까지 이어지지만 그가 정신으로 원하는 것은 그녀에게 가 닿는 것이다. 적어도 우리의 시선은 레나토에 가 닿아야 한다. 그것은 이상도 아니고 단지 보통내기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정당성을 지니고 있는 것 뿐이다. 토르나토레는 친절하게도 이 레나토를 우리네 시선의 안내자로 삼고 있지만 우리는 쉽게도 시실리 마을 사람들의 시선으로 영화를 본다. 이 영화에는 관음증이 시종일관 관통하지만 관음증을 즐기라고 내놓은 것은 아니다. 우리는 그 관음증의 유혹 속에서 최소한 레나토 정도로라도 말레나를 수줍게 바라보고, 우리의 관음증적 욕망을 관조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영화의 관음증은 위험한 줄타기인 것이다. 이 영화를 보고 관음증만 신나게 즐기신 분들에게 이 영화는 몇 천원 내고 1시간 32분간 즐긴 상품일 뿐이다.

감독 : 정지영

출연 : 독고영재, 최민수

 현실이라는 대척점을 벗으로 삼지 않은 이상 속에서 한 인간이 파멸하는 과정은 끔찍하지만 슬프다.

 명길과 현숙이 병석을 떠나지 못하고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들이 가까이 하지 못하는 현실의 반대편을 병석은 강하게 움켜쥐고 있었기 때문이며, 그들에게 병석이 악마인 이유는 병석이 현실과 가상이라는 두 축 사이의 균형을 너무나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강한 빛은 강한 그림자를 만들어내기 마련이듯이 참혹한 현실은 더욱더 찬란한 이상을 만들어 낸다.

 그러나 빛이 꺼져 버리면 그림자도 소멸하듯이 이상은 현실에서 발을 땔 때 자연히 소멸한다.

 그것은 죄악일 것이나 나약한 인간의 슬픈 운명일 수도 있다.

 비참의 한가운데서 영화가 선물하는 가상의 상찬에 메달리는 병석을 쉽게 비난할 수 없듯이. 악마임에도 사랑할 수밖에 없듯이.

 그나저나 나는 시네필이 아님이 분명하다.

 나는 병석 일당만큼도 영화를 모른다.

감독 : 노라 에프론
출연 : 탐 행크스, 멕 라이언, 그렉 키니어

근 한달 반동안 이런저런 핑계로 영화 감상을 할 기회가 없었다. 방학을 맞아 꾸준히 영화를 볼 것을 다짐하며 그 장정의 첫 테이프를 끊을 영화를 무지 고민했다. 우선 첫 영화는 이후의 식욕을 돋구어줄 수 있는 애피타이저가 되어야 했다. 애피타이저는,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는 생각없이 볼 수 있을 정도로 아주 가볍거나 그와 반대로 대단한 집중을 요하는 묵직한 영화가 적당했다. 그러나 비디오 대여점에 무작정 들어가 이것저것 고르는데 이거다 싶은 영화는 눈에 들어오지를 않았다. 그런 날이 있다. 막연히 영화는 보고 싶은데 썩 내키는 영화들은 도무지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질 않는 날 말이다. 그렇게 대여점 안을 방황하다 잡힌 건 유브 갓 메일. 왜 이 영화가 나의 영화 감상 애피타이저가 되어야 하는지 마땅한 이유는 어디에도 없으나 한때 맹목적으로 좋아했던 멕 라이언 표 영화는 그런대로 눈감아줄 만한 면죄부를 품고 있었다. 로맨틱 코미디로 잘 알려진 에프론 자매의 영화라면 더더욱 그렇다.

케슬린 켈리와 그녀의 어머니, 그리고 뉴욕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추억과 애정이 담겨 있는 ‘길모퉁이 서점’이 대형 체인점 폭스 서점으로 인해 문을 닫을 위협에 놓인다. 케슬린이 남자친구 몰래 이메일을 주고 받는 사이버 남자친구 NY152는 케슬린의 마음을 점점 사로잡게 되지만, 실은 NY152는 폭스 서점의 사장 조 폭스이다. 원수지간처럼 지내던 케슬린과 조가 화해할 수 있는 것은 익명의 공간인 온라인 때문이다. 오프라인에서는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는 앙숙이지만 온라인에서 SHOPGIRL과 NY152로 만날 때에는 더없는 조언자이자 사랑스런 친구이다. 결국은 폭스 서점에 밀려 길모퉁이 서점은 문을 닫지만 케슬린은 온라인의 사랑으로 오프라인의 조에게 화해를 구하고 사랑에 골인한다.

이 영화가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은 대자본가에게 소규모 자영업자가 무릎을 꿇는 씁쓸한 얘기라는 점이다. 그나마 인간의 손길이 느껴지는 상점은 박리다매로 승부를 걸 수 있는 공룡의 발에 뭉개진다. 처참하게 뭉개지지만 영화는 소규모 자영업자에게 손을 들어주지 않는다. 일말의 동정심을 유발하지만 그것은 그저 쇼맨쉽에 불과하다. 케슬린은 결국 가게를 잃고 개인적인 동화 집필에 들어간다. 폭스 서점은 승리를 구가하고 조는 케슬린에게 사랑이라는 선물로 그녀에 대한 자신의 폭력을 희석시킨다. 도식적으로 보건대 점점더 친절하고 부드러운 얼굴을 내미는 공격적·폭력적 대자본의 승리는 마지막 장면까지 일관되게 관철된다.

그러나 멕 라이언의 귀여움은 여전하다. 그녀의 총총 걸음과 장난끼 섞인 천진한 미소는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사랑스러운 요소이다. 에프론 자매의 손에서 나온 걸쭉한 대사들도 한몫을 한다. 얼굴에 난 152개의 점을 뽑고 생긴 곰보 자국 152개 있는 남자…(조), 나에게 152가지의 길을 알려주는 남자(케슬린) 등의 대사는 달콤한 사랑스러움을 이 영화에 심어준다. 거기다 길모퉁이 서점에 대한 사람들의 애정과 추억들은 감상적인 애잔함마저 가볍게 불러 일으킨다.

아, 하지만 그러한 달콤함들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친절한 얼굴을 한 대자본의 승리를 위해 연출된 가식에 불과할지니. 케슬린은 어떻게 자신의 생계 기반을 파괴한 남자를 그렇게 쉽게 받아들일 수 있으며 조는 공적 영역에서의 냉정함과 사적 영역에서의 다정다감한 인간미를 어떻게 그렇게 철저하게 이중적으로 분리할 수 있는가. 아무리 판타지라지만 판타지 속에 스며든 메시지란 것이 단지 누추하고 비루한 현실 원칙의 당연함을 설파하는 것이라면 나는 어찌 이 영화를 유쾌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사랑은 들러리에 불과하고 냉혹한 현실이 주가 되어 버린 이 영화는 에프론 자매의 영화가 실은 별 얘기, 별 생각 없음을 스스로 드러내고 있다. 추악함을 사랑스러움으로 가리고 있는 유브 갓 메일은 미국 온라인계의 대기업 AOL사의 홍보용 영화로서 최적격이다. 라이언의 사랑스러움을 나는 그저 겉모습만 즐길 뿐이다.